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과거에는 일식과 월식이 천체의 중심인 해와 달이 잠식되는 불길한 재변이자 하늘이 왕의 잘잘못을 직접 견책하고 근신케 하는 표징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일식이나 월식이 있으면 왕은 소복으로 갈아입고 근신(近臣)들을 이끌고 정전(正殿)월대(月臺) 위에 나가 석고대죄 하듯 하늘에 용서를 비는 구식례를 행했다. 이렇게 하면 그 정성에 하늘이 감복하여 일식·월식을 곧바로 원상대로 회복시켜 준다고 생각했다.
월식 때는 음기를 돋운다 하여 금으로 된 종을 쳐서 구식례를 행했다. 일식 예보가 있으면 시일에 맞추어 각 관청은 어명을 받아 당상관과 낭관 각 1명이 제사 때 입는 엷은 옥색 옷인 천담복(淺淡服)을 입고 기구(祈求)하였다. 당상관이 없는 관청은 행수관(行首官)과 좌이관(佐貳官) 2명이 행하도록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일식과 월식을 구한다는 구식 의례는 조선조 내내 매우 빈번하게 행해졌다. 일식이 예보되면 왕은 소복으로 갈아입고 하루 종일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가 소복을 벗었다. 이 구식 의례는 매우 번거롭지만 일식·월식이 지상의 왕에게 하늘이 내리는 경고라고 여겼으므로 소홀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식과 관련한 사례를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보면, 일관(日官)이 해가 질 때에 일식이 있을 것이라 예보하자, 왕은 소복 차림으로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가 해가 지고 난 뒤에야 소복을 벗었다고 하였다[『태조실록』 2년 7월 1일]. 또한 일식이 있어 왕이 소복 차림으로 신하들을 거느리고 북을 치며 구식하였다는 기록도 있다[『정종실록』 2년 3월 1일]. 일식 예보를 정확히 해야 하는 이유로 구식(求食)하는 전례(典禮)를 거행하기 위함이라 설명하고 있다. 일식의 분도를 정확히 추보하지 못하였다 하여 서운관 부정(副正) 박염(朴恬)을 동래로 유배시켰는데, 태양이란 모든 양기의 으뜸이어서, 덮이거나 먹히는 것이 있으면 천변의 큰 것이므로 마땅히 일식을 중외(中外)에 포고하는 것은 구식하는 전례를 거행하기 위한 것이라 말하였다[『태종실록』 6년 6월 6일]. 예보된 시간부터 일식·월식이 일어나는 때까지 너무 오래 기다리는 게 문제가 되었기 때문인지, 태종대에는 구식의 법을 개정하기도 하였다. 그 후로는 일식·월식이 시작한 뒤에 구식 의례를 행하지 않고, 서운관에서 정한 예보 시각이 되면 북을 울리면서 구식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하늘의 경계[天戒]를 삼가는 본래 뜻에 오히려 합치한다고 보았다[『태종실록』 13년 12월 15일].
일식 때에는 왕이 소복을 입고 인정전(仁政殿)의 월대 위에 나아가 구식하였는데, 의식대로 백관들도 소복을 입고 조방(朝房)에 모여서 구식하였다. 그리고 해가 다시 보인 이후에야 왕이 섬돌로 내려와서 해를 향하여 네 번 절하였다고 하였다[『세종실록』 4년 1월 1일]. 그런데 예보된 시간보다 일식이 약 15분 정도 먼저 일어났다는 이유로 술자(術者) 이천봉(李天奉)에게 곤장을 쳤다고 하였다. 예보의 단위가 상당히 정밀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천문류초(天文類抄)』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사기(史記)』「천관서(天官書)」
■ 『한서(漢書)』「천문지(天文志)」
■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
■ 『여씨춘추(呂氏春秋)』
■ 『회남자(淮南子)』
■ 김일권, 『(동양 천문사상) 하늘의 역사』, 예문서원, 2007.
■ 김일권, 『고구려 별자리와 신화: 고구려 하늘에 새긴 천공의 유토피아』, 사계절, 2008.
■ 김일권, 『우리 역사의 하늘과 별자리: 고대부터 조선까지 한국 별자리와 천문 문화사』, 고즈윈,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