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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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鄕妓)

서지사항
항목명향기(鄕妓)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여령(女伶), 여악(女樂)
동의어외방여기(外方女妓)
관련어경기(京妓), 기안(妓案), 선상기(選上妓), 정재(呈才)
분야문화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에 지방관아에 소속되어 악가무(樂歌舞)를 담당한 기녀.

[개설]
향기(鄕妓)는 문자 그대로 지방 고을의 기녀를 가리키는 말로, 외방여기(外方女妓)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에 비해 서울에서 활동하는 여기는 경기(京妓)라고 하였다. 향기는 지방관아에 소속되어, 신역(身役)으로 공연 예술 활동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향기의 신분은 공천(公賤)이었으며, 50세가 되면 기녀의 역을 면제받았다. 평상시에는 해당 관아에 소속되어 공연 활동을 하다가, 궁중에 잔치가 있으면 중앙에 선상(選上)되어 정재(呈才)를 공연하였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지방에서 기녀를 선발하여 3년간 궁중에 머물며 악가무를 익히고 경기로서 공연하게 하다가, 기한이 차면 다시 해당 관아로 내려보냈다. 그러나 1623년(광해군 15)의 인조반정을 계기로 서울에 상주하던 경기가 혁파된 뒤에는, 연향이 있을 때에 맞추어 향기를 잠시 중앙으로 불러올려 공연을 하게 한 뒤 공연이 끝나면 바로 지방관아로 돌려보냈다.

지방관아의 향기는 기생 명부에 해당하는 기생안(妓生案)에 기록되었다. 지방관아의 입장에서는 기생의 주요 직역인 악가무의 예술 활동은 특별한 관리가 필요한 분야였다. 따라서 기생안에 모든 기생의 이름과, 역과 관련된 변동 사항을 기록해 보관하였다.

또한 향기는 중국과 일본의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그들이 경유하는 고을에 배치되거나, 군사를 위로하고 야인을 회유하기 위해 변진(邊鎭)이 설치된 고을에 소속되는 경우가 많았다. 평안도의 평양·영변·정주, 황해도의 해주·안악·풍천·황주, 함경도의 회령·경원·온성·종성, 그리고 경상도와 충청도의 여러 고을에 향기가 있었는데, 큰 고을에는 그 수가 거의 1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경기와 향기를 아우른 여악(女樂)을 혁파하려는 논의가 지속적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연산군 때의 율려습독관(律呂習讀官) 어무적(魚無跡)은 상소를 올려, 『경국대전』에서는 군사 가운데 아내가 없는 사람을 위해 여악을 두게 하였으나 여자가 군중에 있는 것은 병법에서 꺼리는 일이라며 경기와 향기를 혁파할 것을 건의하였다[『연산군일기』 7년 7월 28일].

한편, 향기의 공연 활동을 관장한 장악원의 제조는 향기의 볼품없는 옷차림을 개선하기 위해, 지방관아의 수령으로 하여금 향기의 지아비에게서 면포를 거두어 올려 보내게 하고, 봉족(奉足)을 다시 붙여줄 것을 요청하였다[『연산군일기』 11년 1월 11일].

[변천]
조선시대 전기에는 향기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 파악하기 어렵지만, 조선시대 후기의 경우 각종 의궤를 통해 향기의 공연 활동을 살펴볼 수 있다. 『영조갑자진연의궤(英祖甲子進宴儀軌)』에 따르면, 1744년(영조 20)의 진연을 위해 6도 18읍에서 52명의 향기가 궁중으로 선상되었다. 6도 가운데 평안도에서 과반수에 가까운 25명이 선발되었고, 경상도 9명, 황해도 7명, 전라도 6명, 충청도 4명, 강원도에서는 1명이 선발되었다. 이처럼 평안도의 향기가 많이 선상된 것은 사행로인 평안도에 가장 많은 기생이 상주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사신을 위해 활발하게 공연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향기들은 궁중의 진연에서 정재를 공연했을 뿐 아니라 노래와 악기 연주까지 수행했으며, 이를 위해 장악원 소속의 관원에게 교육을 받았다.

한편 각 지방에서 향기를 뽑아 올리지 않고 궁중연향을 치르는 경우도 있었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따르면, 1795년(정조 19)에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경축하기 위한 진찬이 화성의 봉수당에서 펼쳐졌다. 이때 화성에 소속된 향기 15명과, 의녀와 침선비 출신의 경기 16명이 함께 정재에 출연하였다. 다른 지방에서 향기를 선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화성 향기와 경기의 비중도 엇비슷하였다.

향기는 궁중이 아닌 지방관아에서도 활발히 공연 활동을 펼쳤다. 조선시대 후기의 각종 읍지(邑誌)를 살펴보면, 각 지역의 교방(敎坊)에서 무고(舞鼓)·포구락(抛毬樂)·선유락(船遊樂)·향발무(響鈸舞)·검무(劍舞)·처용무(處容舞)·아박무(牙拍舞) 등의 정재가 교습 및 연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진주 교방에서 교습한 가무에 대한 기록이 자세한데, 1865년(고종 2)에 편찬된 『교방가요(敎坊歌謠)』에는 육화대(六花隊)·연화대(蓮花隊)·고무(鼓舞)·포구락·검무·선악(船樂) 등의 정재를 비롯해 논개를 기리는 의암별제(義巖別祭)의 절차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영조갑자진연의궤(英祖甲子進宴儀軌)』
■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 『교방가요(敎坊歌謠)』
■ 김종수, 『조선시대 궁중연향과 여악연구』, 민속원, 2003.
■ 박민영, 「‘기생안’을 통해 본 조선후기 기생의 공적 삶과 신분 변화」, 『대동문화연구』 71, 2010.
■ 배인교, 「조선후기 지방 관속 음악인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7.
■ 조경아, 「조선후기 연향 의궤를 통해 본 정재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9.

■ [집필자] 조경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