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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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발(響鈸)

서지사항
항목명향발(響鈸)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무구(舞具), 악기(樂器)
관련어동발(銅鈸), 정재(呈才), 향발무(響鈸舞), 향악정재(鄕樂呈才)
분야문화
유형물품 도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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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에 향악정재인 향발무(響鈸舞)를 연행할 때 사용한, 작은 바라 혹은 심벌즈 모양의 타악기.

[개설]
향발(響鈸)은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동발[鈸]을 울린다[響].”라는 뜻으로, 향발무를 연행할 때 사용한 일종의 악기이자 춤 도구[舞具]를 가리킨다. 『악학궤범(樂學軌範)』에 따르면, 무용수는 놋쇠로 된 향발을 양손에 하나씩, 엄지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에 각각 매고 향발무를 추었다. 무용수의 숫자는 연향에 따라 달랐는데, 그에 따라 사용되는 향발의 수에도 차이가 있었다.

[연원 및 변천]
향발은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향발무에만 사용되었다. 향발 또는 향발무에 관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은 세종대에 나타나는데, 향발 정재를 비롯해 여러 음악과 춤을 새로 정하여 공연(公宴)에 사용하게 하였다[『세종실록』 31년 10월 3일]. 연산군은 향발 정재에 쓸 향발 20부(部)를 급히 만들게 하기도 했다[『연산군일기』 11년 1월 5일].

조선시대 후기에는 숙종이 기로신(耆老臣)들에게 잔치에 베풀면서 향발무를 공연하게 하였으며[『숙종실록』 45년 4월 18일], 영조는 외연(外宴)의 3작 절차에서 무동(舞童)이 향발무를 추도록 정하기도 하였다.[『영조실록』 19년 9월 19일]. 한편, 향발은 궁중뿐 아니라 지방의 교방(敎坊)에서 공연되던 향발무에도 사용되었다.

[형태]
향발의 형태는 『악학궤범』에 자세히 전한다. 향발은 놋쇠로 만드는데, 모양은 동발(銅鈸)과 같지만 크기가 작다. 향발 뒤에 사슴 가죽 끈을 달고, 오색 매듭을 드리운다. 향발의 지름은 2치 1푼이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향발은 공연에 따라 제작하는 수량이 달랐다. 1829년(순조 29)의 『순조기축진찬의궤(純祖己丑進饌儀軌)』에 따르면, 8명이 향발무를 공연했으므로 8쌍의 향발을 만들었는데, 총 51냥 3푼의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그에 비해 1848년(헌종 14)의 진찬에서는 4명이 향발무를 공연하였으므로 4쌍의 향발이 사용되었다. 『헌종무신진찬의궤(憲宗戊申進饌儀軌)』에 따르면, 이때에는 기존에 있던 향발을 다시 색칠하고 보수해 사용하였는데, 총 27냥 3전 2푼의 비용이 들었다. 두석장(豆錫匠) 1명이 1일간, 다회장(多繪匠) 2명 3일간 매일 식비 3전 6푼을 받으며 향발을 만들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 『악학궤범(樂學軌範)』
■ 『헌종무신진찬의궤(憲宗戊申進饌儀軌)』
■ 국립국악원, 『신역 악학궤범』, 국립국악원, 2000.
■ 평양국립출판사, 『악학궤범』, 1956.
■ 한국예술학과 음악사료강독회 역주, 『국역 헌종무신진찬의궤:권3』,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2006.
■ 배인교, 「조선후기 지방 관속 음악인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7.

■ [집필자] 조경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