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정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궁중에서 당악정재(唐樂呈才)를 상연할 때 사용한 봉황이 그려진 부채 모양의 의물(儀物).
[개설]
고려시대부터 당악정재를 공연할 때 사용한 부채 모양의 의물로, 홍색 비단으로 된 부채 좌우에 금색의 봉황이 한 마리씩 그려져 있다. 당악정재를 상연할 때는, 무대 좌우에 각각 2명씩 차례대로 인인장(引人杖)·정절(旌節)·용선(龍扇)·정절·봉선·정절·작선(雀扇)·정절·미선(尾扇) 등을 들고 서서 춤을 추었다. 이때 봉선을 든 2명은 좌우로 나뉘어, 용선 뒤의 정절과 작선 앞의 정절 사이에 위치하였다[『세종실록』 10년 5월 26일].
[연원 및 변천]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 따르면, 봉선은 고려시대의 당악정재인 헌선도(獻仙桃)·오양선(五羊仙)·포구락(抛毬樂) 정재 등에 사용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전기에는 금척(金尺)·수보록(受寶籙)·근천정(覲天庭)·수명명(受明命)·하황은(荷皇恩)·하성명(賀聖明)·성택(聖澤)·육화대(六花隊)·곡파(曲破) 등의 당악정재에 의물로 쓰였고, 이례적으로 향악정재(鄕樂呈才)인 봉래의(鳳來儀)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한편 1901년(고종 38)의 『(신축)진연의궤』를 살펴보면, 1897년(고종 34)에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에는 봉선을 홍색 비단이 아니라 황제의 색인 황색의 비단으로 만들고 ‘황봉선’이라고 불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형태]
봉선은 정재의장(呈才儀仗)뿐 아니라 일반적인 의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그 모양은 서로 달랐다[『세종실록』 6년 6월 14일]. 정재의장으로 쓰인 봉선의 형태는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먼저 봉선의 자루는 대나무로 만들었다. 부채의 테두리는 쇠로 둘렀으며, 부채의 양면은 홍색 비단을 씌워 초록 실로 꿰매고 금색으로 채색한 봉황을 그려 넣었다. 채색이 아니라 수를 놓는 방식으로 봉황을 넣는 경우도 있었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예부터 봉황이 나타나면 성군의 덕치가 펼쳐져 천하가 평안해진다고 여겼다. 그래서 궁궐에 봉황을 장식하여 봉궐(鳳闕)이라 하고, 왕이 타고 다니는 가마를 봉여(鳳輿)라 하여 현 왕조가 태평성대임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봉황은 군왕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으나, 중국에서는 황후나 태자비의 상징으로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