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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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개(黃蓋)

서지사항
항목명황개(黃蓋)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개(蓋), 의물(儀物), 의장(儀仗)
관련어당악정재(唐樂呈才), 정재(呈才), 홍개(紅蓋), 흑개(黑蓋)
분야문화
유형물품 도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궁중에서 당악정재(唐樂呈才)를 상연할 때 사용한, 황색 휘장이 세 겹 달린 긴 우산 형태의 의물(儀物).

[개설]
고려시대부터 당악정재에는 삼층 우산 형태의 의물인 황개·홍개·흑개 등이 사용되었다. 개(蓋)를 든 기녀는 협무(挾舞) 뒤에 자리했으며, 특히 황개를 든 기녀는 무대 가운데에 위치하였다.

[연원 및 변천]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 따르면, 황개를 비롯한 개는 고려시대부터 오양선(五羊仙)과 헌선도(獻仙桃) 등의 당악정재에 의물로 쓰였는데, 정재에 따라 사용되는 개의 수가 달랐다. 조선시대 전기의 당악정재에서도 개는 그 수를 달리하여 사용되었다. 근천정(覲天庭)·성택(聖澤)·수명명(受明命)·육화대(六花隊)·하황은(荷皇恩)·헌선도 등의 정재에는 3부의 개가 사용되었고, 포구락(抛毬樂)·하성명(賀聖明) 등에는 4부의 개가, 금척(金尺)·오양선 등의 정재에는 5부의 개가 사용되었다. 또한 이례적으로 향악정재(鄕樂呈才)인 봉래의(鳳來儀)에 4부의 개가 쓰이기도 하였다. 이후 1897년(광무 1)에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에는 황제의 색인 황색의 휘장이 달린 황개만 사용되었다.

한편, 세종대에는 크고 작은 조회(朝會)나 경축 행사 등 각종 길례(吉禮)에 사용하는 길장(吉仗)으로 청개(靑蓋)가 쓰이기도 하였다[『세종실록』 4년 9월 6일].

[형태]
개는 정재의장(呈才儀仗)뿐 아니라 일반적인 의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그 모양은 서로 달랐다.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전하는 황개는 개의 길이가 2자 3푼, 개의 지름은 1자 2치, 휘장 끝의 둘레는 5자 1치이며, 대나무 자루의 길이는 8자, 대나무의 지름은 8푼이다. 자루는 나무로 만들어 주홍칠을 하고, 위에는 굽은 쇠를 박아 개를 그 밑에 달 수 있도록 하였다. 개의 꼭지는 은으로 만들었으며, 황색 비단으로 세 겹의 휘장을 만들어 금봉문(金鳳紋)·금화문(金花紋)을 새겨 넣었다. 개 안에는 4개의 색실 매듭을 드리웠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고대 중국의 전설상의 제왕인 황제(黃帝)는 화개(華蓋)를 썼다고 하는데, 개는 모두 권력자의 의장으로 정치권력과 위엄을 상징했다. 한편 1829년(순조 29)의 『순조기축진찬의궤(純祖己丑進饌儀軌)』에 따르면, 정재 의물인 황개 1부, 홍개 2부, 흑개 2부를 제작하는 데 총 179냥 2전 9푼의 비용이 들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악학궤범(樂學軌範)』
■ 『순조기축진찬의궤(純祖己丑進饌儀軌)』
■ 『고종신축진연의궤(高宗辛丑進宴儀軌)』
■ 국립국악원, 『신역 악학궤범』, 국립국악원, 2000.
■ 한국문화상징사전편찬위원회, 『한국문화상징사전』, 동아출판사, 1992.

■ [집필자] 조경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