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원종은 1580년(선조 13) 6월 22일에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1587년(선조 20년)에 정원군(定遠君)에 봉해졌다. 1615년(광해군 7) 왕위에 불안을 느낀 광해군에 의해 아들 능창군(綾昌君)이 유배를 당했다가 세상을 떠나자, 그 뒤 병이 깊어져 1619년(광해군 11)에 40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의 경계와 재촉 때문에 장례마저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임시로 급히 장사하였다. 1623년에 인조가 반정으로 즉위한 뒤 정원군을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으로,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이었던 구씨는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으로 진봉하고 계운궁(啓運宮)이란 궁호를 내렸다.
인헌왕후는 1626년(인조 4) 1월 경희궁 회상전에서 49세의 나이로 승하하여, 김포 성산 언덕에 안장되었다. 이때 인조는 원종의 묘를 흥경원(興慶園)으로, 인헌왕후의 묘는 육경원(毓慶園)으로 격상시켰다. 이듬해에는 임시로 장사했던 원종의 묘를 천장하여 인헌왕후와 나란히 쌍릉으로 다시 장사지냈다[『인조실록』 5년 8월 27일]. 1632년(인조 10)에는 정원대원군의 시호를 올리고, 능호를 장릉이라 하였다.
[조성 경위]
원종은 1580년 6월 22일 경복궁 별전에서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1590년(선조 23)에 11세의 나이로 가례를 올렸고, 1604년(선조 37)에는 임진왜란 중 왕을 호종한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이 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 2월에는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는데, 광해군은 평소 원종의 아들 능창군의 모습이 범상치 않다는 말을 들어 왔다. 더욱이 원종의 새문동 사제와 원종의 어머니인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선영에 왕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으로 항상 의심하였다. 심지어는 원종의 집을 빼앗아 허물고 경덕궁을 지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615년(광해군 7), 황해도 수안군수(遂安郡守) 신경희(申景禧) 등이 능창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무고를 계기로 커다란 옥사가 일어났다. 그로 인해 능창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광해군일기』 7년 11월 17일]. 그 뒤 원종은 몸져누워 1619년 12월 29일, 40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광해군이 장기(葬期)를 재촉하고 사람을 시켜 조문객을 기찰하게 한 까닭에 제대로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양주 곡촌리에 임시로 장사하였다[『광해군일기』 11년 12월 29일].
인헌왕후는 능안부원군 구사맹(具思孟)의 딸로, 1578년(선조 11) 4월 17일에 태어났다. 정원군과 가례를 올리고 연주군부인에 봉해졌다. 인조가 즉위한 뒤 연주부부인으로 진봉되었고, 1626년 1월 14일 경희궁 회상전에서 승하하여 5월 18일 김포 성산 언덕에 안장되었다. 왕의 어머니로 승하했으나 원종이 추숭되기 전이므로, 묘호를 육경원이라 하였다. 1627년(인조 5)에는 임시로 조성한 원종의 묘를 천장하여 인헌왕후와 나란히 안장하였고, 1632년에는 정원대원군을 ‘경덕인헌정목장효대왕(敬德仁憲靖穆章孝大王)’으로, 연주부부인을 ‘경의정정인헌왕후(敬毅貞靖仁獻王后)’로 시호를 올리면서 정원대원군의 묘호(墓號)인 흥경원(興慶園)을 장릉이라 하였다[『인조실록』 10년 3월 11일].
[조성 상황]
광해군은 왕위를 위협하는 인물로 원종과 그의 후손을 지목하고 항상 경계했는데, 1619년(광해군 11) 12월 29일에 원종이 죽자 장례마저 편히 지낼 수 없게 하였다. 그 때문에 원종은 양주 곡촌리에 임시로 묻히게 되었다.
1623년에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면서 원종의 부인 구씨는 계운궁이란 궁호를 받았다. 1626년 1월 14일에 계운궁이 세상을 떠나자, 인조는 왕후의 예로 장례를 치르려 하였다. 그러나 원종이 왕으로 추존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신하들이 극구 반대하였다[『인조실록』 4년 1월 20일].
그해 3월에 능(陵)과 원(園)은 모두 왕과 왕후의 무덤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계운궁의 묘호(墓號)를 ‘묘(墓)’로 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묘호(墓號)를 원(園)으로 정할 것을 명하였다. 이어 4월에는 아버지 원종의 묘부터 흥경원이라 정하고, 계운궁의 묘는 육경원이라 하여 5월 18일 김포에 안장하였다. 이때 흥경원을 천장할 계획을 세웠으나, 1627년 1월에 정묘호란이 일어나 천장이 잠시 중단되었다가 그해 8월 27일에 실행되었다. 흥경원은 천장 당시에는 왕릉의 격식을 갖추지 못했는데, 1632년(인조 10) 4월 23일에 장릉으로 격상됨에 따라 도감을 설치하여 능역의 석물을 다시 마련하였다. 장릉의 석물은 경릉(敬陵)의 예에 따라 난간석은 설치하지 않고 수석만 각각 2개씩 배설하였으며, 얕은 호석으로 봉분을 둘렀다.
[변천]
장릉은 조성된 이후 인조대에 기록된 화재만도 3건이 있었다. 이후 1698년(숙종 24)에는 방화범을 잡아 정형에 처했는가 하면, 1755년(영조 31)에도 왕후의 능상에 불이 난 일이 있었다. 1796년(정조 20)에 장릉을 관찰하고 수개하였고, 1827년(순조 27)에는 정자각을 수리하였으며, 1831년(순조 31)에는 사초를 수개하였다.
오늘날 장릉의 능역에는 정자각과 수복방, 신도비각이 배치되어 있는데, 비각에는 1753년(영조 29)에 ‘조선국원종대왕장릉 인헌왕후부좌(朝鮮國元宗大王章陵仁獻王后祔左)’라고 새긴 비가 세워져 있다.
재실 영역은 재실과 행랑채,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재실은 동남향을 하고 있다. 이 재실은 원래 현재 재실 서쪽에 있는 연지(蓮池)의 동북쪽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재실의 이축 또는 중수 과정이나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문채의 종도리에 1859년(철종 10)에 상량한 기록이 남아 있다.
[관련 사항]
인조는 1632년(인조 10) 5월 3일에 인헌왕후의 본관인 능성현(綾城縣)을 능주목(綾州牧)으로 승격시켰다[『인조실록』 10년 5월 3일]. 이는 세조의 비(妃)인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예를 따른 것인데, 세조는 즉위한 뒤 파산(坡山)을 왕후의 본관이라 하여 현(縣)에서 주(州)로 승격시킨 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