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경종이 1724년(경종 4) 8월 25일에 승하하자, 양주 남쪽 중량포 천장산(天藏山) 언덕을 택하여 능침을 조성하고 능호를 의릉이라 하였다. 1730년(영조 6) 10월에는 선의왕후 어씨를 합장하였다. 두 능침은 같은 언덕에 상하(上下)로 배치되었는데, 여주에 위치한 효종과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능인 영릉(寧陵)과 비슷하다.
[조성 경위]
경종은 재위 4년 만인 1724년 8월 25일, 창경궁 환취정에서 승하하였다. 그날 우의정 이광좌(李光佐)를 총호사(摠護使)로, 오명준(吳命峻)·심수현(沈壽賢)·이사상(李師尙)을 산릉도감(山陵都監) 제조(提調)로 임명하였다. 9월 16일에 산릉 터를 간심한 결과, 총호사 이광좌는 옛 영릉(寧陵)을 주장하고 국장도감(國葬都監) 당상(堂上) 김일경(金一鏡)과 이사상 등은 중량포를 주장하였다. 이에 영조는 옛 영릉이 건원릉(健元陵) 경역 내에 있으며 산세도 매우 좋으나 천릉한 옛터에 새 능을 조성한 사례가 없으므로 신중하게 살펴야 한다는 이유에서 중량포를 다시 살펴보게 한 뒤 그곳을 능지로 선택하였다. 9월 24일에 산릉을 조성하기 시작했으며, 산릉이 궁궐에서 가까워 12월 16일에 발인하여 당일에 재궁을 현궁에 안치하였다. 봉분을 만들고 그달 24일에 공역을 마쳤다.
산릉의 제도는 부왕 숙종의 능인 명릉(明陵)의 전례를 따랐다. 능상의 석물 및 봉분의 규모를 모두 명릉과 같게 하였으며, 정자각도 명릉과 마찬가지로 정전 3칸에 좌우 익각을 갖추고 배위청을 3칸으로 하여 총 8칸 규모로 조성하였다. 또 정자각의 좌우에는 수라간과 수복방을 각각 3칸 규모로 조성하였다.
1730년(영조 6) 6월 29일에는 선의왕후가 경희궁 어조당에서 승하하였다. 당일에 우의정 이집(李㙫)을 총호사로 임명하고 산릉도감 당상으로 신사철(申思喆)·서명균(徐命均)·어유룡(魚有龍)을 임명하였다. 7월 4일에는 산릉 터를 간심하고, 이튿날 의릉의 하혈(下穴)로 결정하였다[『영조실록』 6년 7월 5일]. 선의왕후의 능은 왕릉과 같은 언덕 80자 정도 아래쪽에 조성되었다. 그런데 1724년(경종 4)에 경종을 의릉에 장사 지낼 때 이미 선의왕후는 의릉의 왼편에 쓸 만한 혈(穴)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 묻히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냈다고 한다. 능침 조성 공사는 8월 6일에 시작되었으며, 10월 19일에 발인하여 당일에 재궁을 현궁에 안치하였다[『영조실록』 6년 10월 19일].
선의왕후의 능침 역시 능상의 제도는 명릉을 따랐으며, 정자각·비각·수라간·수복방·재실 등은 왕릉을 조성할 때 이미 갖추었으므로 별도로 건설하지 않았다. 의릉은 1724년에 경종을 위해 처음 조성되고, 1730년에 선의왕후를 같은 언덕에 안장함으로써 상하로 배치된 두 개의 봉분이 완성되었다.
[변천]
1962년에는 중앙정보부가 의릉 경내에 자리 잡았다. 그러면서 왕릉의 우측 능선을 깎아 축구장을 만들고 청사를 세웠다. 1970년 5월에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나, 1972년 정자각과 홍살문 사이에 인공 연못을 만들어 조경 시설을 설치하고, 1973년에 고종의 아들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의 묘소인 영원(英園)을 조성하면서 재실을 이건하는 등의 훼손이 계속되었다. 1995년에 중앙정보부가 이전하면서 토지가 반환되어 능역을 정비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 『[경종]의릉산릉도감의궤([景宗]懿陵山陵都監儀軌)』
■ 『[선의왕후]의릉산릉도감의궤([宣懿王后]懿陵山陵都監儀軌)』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능묘』,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10.
■ 문화재청, 『의릉 능제복원 기본 및 실시설계』, 문화재청,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