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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의민황태자는 영왕(英王) 또는 영친왕(英親王)이라고도 한다. 순종의 배다른 동생으로 황태자에 책봉된 의민황태자는 일본에 건너가 교육을 받았으며, 1920년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 집안의 모리마사왕[守正王]의 딸 마사코[方子]와 정략적으로 혼인하였다. 1922년 황태자와 그의 비, 황손이 도쿄에서 귀국하여 덕수궁 석조전에 머무르던 중, 생후 10개월 된 황손 이진이 병이 나서 미처 손을 써 보지도 못한 채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났다[『순종실록부록』 15년 4월 26일][『순종실록부록』 15년 5월 11일]. 이에 의민황태자의 생모 순헌귀비(純獻貴妃) 엄씨(嚴氏)의 묘인 영휘원(永徽園)의 남쪽에 장사하고, 원호를 ‘숭인’이라 하였다[『순종실록부록』 15년 5월 15일]. 숭인원은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있다.
[조성 경위]
황손이 세상을 떠나자, 당일에 종척과 귀족을 비롯해 이왕직(李王職)의 장관 이하 고등관이 석조전에서 모여 장의 절차를 논의하였다. 그리고 장의 위원장에 이왕직 차관 우에바야시 게이지로[上林敬次郞]를 임명하고 나머지 부위원장과 장의 위원 등을 임명하였다[『순종실록부록』 15년 5월 11일]. 이튿날 경기도 고양군에 위치한 영휘원 국내(局內)를 살펴보고는 원소(園所)로 정하여 봉표를 하였다. 닷새 뒤인 5월 17일, 덕수궁 덕홍전에서 발인하여 숭인원에 안장하였다.
[조성 상황]
원소는 갑좌경향(甲坐庚向)으로 정하였다. 『숭인원어장의등록(崇仁園御葬儀謄錄)』에는 장례에 사용된 기물과 의장(儀仗), 석물과 건물의 도설이 수록되어 있다. 석물은 혼유석과 장명등은 1개씩, 망주석과 문인석은 1쌍씩, 호석(虎石)과 마석(馬石)은 2개씩 설치하였다. 건물로는 정자각과 비각을 지었으며, 재실 이하 각처는 영휘원의 재실을 이용하도록 하였다. 표석의 전면은 민형식(閔衡植)이 썼고, 지문은 정만조(鄭萬朝)가 짓고 이달용(李達鎔)이 썼다.
[관련 사항]
숭인원과 영휘원 자리는 원래 고종의 비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초장지인 홍릉(洪陵)의 경역이었다. 고종이 승하한 뒤 남양주 금곡으로 옮겨 새로 홍릉을 조성하고 명성황후를 고종과 합장하였다. 그 뒤 고종의 후궁이자 의민황태자의 생모인 순헌귀비 엄씨가 승하하자 홍릉을 천장하고 비어 있던 경역을 장지로 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