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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순회세자(順懷世子)는 명종의 맏아들로, 1551년(명종 6)에 태어났다. 7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지만, 1563년(명종 18) 13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약 30년 뒤인 1592년(선조 25)에는 세자빈인 공회빈(恭懷嬪) 윤씨(尹氏)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인해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하였고[『선조실록』 34년 4월 25일], 훗날 가매장한 시체마저 찾지 못해 허장(虛葬)하여 세자묘에 합장하였다. 1870년(고종 7) 12월 10일에 순회묘를 순창원으로 고쳐 불렀다.
[조성 경위]
순회세자는 1551년(명종 6)에 태어나 1557년(명종 12)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1560년(명종 15)에 전 참봉(參奉) 황대임(黃大任)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았으나 그녀의 몸이 병약하여, 이듬해 윤옥(尹玉)의 딸로 다시 세자빈을 정하였다[『명종실록』 16년 7월 21일]. 1563년(명종 18) 9월 20일에 세자가 13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시호를 순회라 하였다[『명종실록』 18년 9월 23일].
세자빈 윤씨는 10세에 간택되어 덕빈(德嬪)에 책봉되었다. 이듬해에 세자가 세상을 떠났으나,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유명(遺命)에 따라 궁궐에서 나가지 못하였고, 또 왕이 세자를 세우지 않았으므로 계속 동궁에 거처하였다[『선조수정실록』 25년 3월 3일]. 1592년(선조 25) 3월 3일에 유명을 달리했는데, 임진왜란으로 인해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이듬해 선조가 피난에서 돌아와 가매장한 시체를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해, 시체 없이 장사를 지내는 허장을 하여 세자묘에 합장하였다.
1592년 3월 3일에 순회 세자빈이 세상을 떠나자, 시호를 공회라 하고 세자묘에 부장하려고 공사를 크게 일으켰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임진왜란을 만나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왕이 피난을 가게 되었다. 빈소를 모시고 있던 관리 몇 사람이 후원에 임시로 매장하려 했으나 재궁이 무거워 옮길 수 없었고, 잠시 뒤에 궁궐에 불이 나는 바람에 관리들도 모두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권징(權徵)의 군관인 사평(司評) 이충(李忠)이 창경궁을 지나다가 덕빈의 빈궁에 난민들이 난입하여 잡물을 훔쳐 가는 모습을 보고는 시체를 함춘원에 임시로 매장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에 선조가 도성에 돌아와 시체를 찾으려 했을 때 이충은 이미 죽었고, 여러 곳을 파 보았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선조실록』 26년 4월 18일]. 그래서 순회묘는 순회세자가 먼저 안장되고 나중에 세자빈을 허장하여 합장한 능이 되었다.
[변천]
1870년(고종 7)에 세자 또는 세손의 묘호를 ‘원(園)’으로 높이고 수위관을 수봉관으로 고칠 때 순회원(順懷園)을 순창원으로 고쳤다. 이때 소현세자의 묘인 소현원(昭顯園)은 소경원(昭慶園)으로, 세자빈 민회빈(愍懷嬪)의 묘인 민회원(愍懷園)은 영회원(永懷園)으로 바꾸었다.
또 의소세손(懿昭世孫)의 묘인 의소원(懿昭園)은 의령원(懿寧園)으로, 의소세손의 사당인 의소묘(懿昭廟)는 영소묘(永昭廟)로 고쳤다[『고종실록』 7년 12월 10일]. 순창원은 능역 아래에 정자각이 남아 있는데, 1998년에 보수 공사가 있었다. 그 외에 재실과 관련된 건축물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관련 사항]
순회세자의 장례에 관한 모든 일은 세조의 장자이자 덕종(德宗)으로 추존된 의경세자(懿敬世子)의 예에 따르도록 하였다. 그런데 상여의 이동 경로가 문제가 되었다. 의경세자의 상여는 돈의문을 경유했는데, 순회세자의 상여가 돈의문을 지날 경우 돈의문 밖에 있는 인가를 헐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에 명종은 종루(鐘樓)로 나가 숭례문을 경유하도록 하였다. 이는 예종의 비 장순빈(章順嬪)의 국장 때 종루의 서쪽 허로(虛路)를 경유한 전례를 따른 것이지만, 사간원(司諫院)에서는 반대하였다[『명종실록』 18년 10월 23일].
1601년(선조 34)에 선조는 순회세자와 공회빈의 신주를 세우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순회세자 묘의 제도는 이후 소현세자(昭顯世子)의 궁호, 묘호, 사당 등을 짓는 전례가 되었다[『인조실록』 23년 5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