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수실(壽室)

서지사항
항목명수실(壽室)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동봉이실(同封異室), 석실(石室), 세종(世宗), 소헌왕후(昭憲王后), 수릉(壽陵), 쌍릉(雙陵), 영릉(英陵), 합장릉(合葬陵), 허우지제(虛右之制), 현궁(玄宮)
분야왕실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살아있을 때 미리 만들어 놓은 무덤, 혹은 왕이 먼저 세상을 떠난 왕후의 석실을 조성할 때 미리 마련해 두는 석실.

[개설]
살아있을 때 미리 만들어 놓는 무덤을 수실(壽室)이라 하며, 왕의 경우 격을 높여 수릉(壽陵)이라 부른다. 『조선왕조실록』의 수릉과 수실의 용례를 살펴보면, 왕이 살아있을 때 능을 조성한 것을 수릉이라 하며, 석실을 만들어 비어 둔 것을 수실이라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5년(태조 4)에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묻힐 땅을 물색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396년에 전라도 역부(役夫)들이 수릉의 개석(蓋石)을 운반하다가 넘어져서 다쳤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태조실록』 5년 9월 28일], 이때 이미 수릉의 석실을 조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태조가 세상을 떠난 것은 그 후로 12년이 지난 1408년(태종 8) 5월 24일이다.

태종은 1420년(세종 2) 1월에 경기도 광주 대모산(大母山)에 명당을 정해 두었다. 그해 7월에 태종비 원경왕후(元敬王后)가 승하하자 미리 정해 둔 곳을 파보니 윤택한 흙이 나와 명당임을 확인하고 동쪽에 왕후의 석실을 조성하고 서쪽에 자신의 자리를 예비하였다[『세종실록』 2년 9월 7일].

세종은 그의 재위 20년이 되는 1438년(세종 20) 10월 1일에 태종의 헌릉(獻陵) 주변에서 수릉의 터를 모색하였다[『세종실록』 20년 10월 1일]. 1444년(세종 26) 7월에 헌릉의 보수공사를 진행하면서 그 서쪽 혈을 보토하여 자신의 수릉으로 삼았다[『세종실록』 26년 7월 17일]. 2년이 지난 1446년(세종 28) 3월 24일에 세종비 소헌왕후(昭憲王后)가 승하하자 왕후의 석실을 조성하면서 그 서쪽에 자신의 석실을 미리 만들어 수실(壽室)이라 칭하였다.

[내용 및 특징]
수실의 구조는 1446년(세종 28)에 세종이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능침을 조성하면서 기록한 능실(陵室)의 제도를 살펴보면, 상세히 이해할 수 있다. 세종은 하나의 현궁(玄宮) 안에 두 개의 실(室)을 조성하여, 왕후의 실(室)은 동쪽으로 하고 이후에 사용될 자신의 실은 서쪽으로 배치하였다[『세종실록』 28년 7월 19일].

석실로 능침을 만들 때 합장릉일 경우, 미리 수실을 만들어 두는 이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석재와 공력을 이중으로 들이지 않기 위함이다. 하나의 광(壙)을 판 뒤 숯가루 다짐과 삼물 다짐으로 구조를 단단히 하여 외부와 분리한다. 그런 다음 내부에는 좌우에 방석(傍石)을 두며, 북쪽에 우석(隅石)을 세우고 남쪽에는 재궁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비석(門扉石)을 설치한다. 이처럼 하나의 큰 석실을 만든 뒤 가운데에 격석(隔石)을 배치하여 두 개의 석실, 즉 동실과 서실로 구분해 합장을 예비한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동실과 서실을 가로막은 격석에 창혈(牕穴)을 설치하기 위함이다. 이는 두 개의 실을 별도로 만들지만, 창혈을 통해 두 실이 통하도록 한 배려이다.


수실을 비워 둘 경우 공기가 들어차거나 좋지 않은 물질이 들어오기도 하므로 내부는 깨끗한 재료로 채워 두었다. 우선 격석의 창혈을 횡경판으로 막아 동실과 서실이 서로 통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본토와 가는 모래, 굵은 돌, 회재(灰滓) 등으로 가득 채운 뒤, 문비석을 임시로 가로막고 회를 발라 틈을 메웠다.

[변천]
조선초기에는 왕이 미리 수릉의 터를 정하거나 수실을 만들어두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1479년(성종 10)에 이르러 수릉을 미리 정해둘 경우 경작이 불가하며 인가를 철거하고 수목을 심어야 하니 백성에게 폐단이 된다는 의견이 제기되면서 수릉의 관례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성종실록』 10년 1월 10일].

1468년(예종 즉위)에 세조의 능인 광릉(光陵)을 조성할 때는 세조의 뜻에 따라 석실을 조성하지 않고 회곽(灰槨)으로 능침을 만들었다[『예종실록』 즉위 9월 19일 2번째기사]. 이때 이후로 능침을 석실로 조성하는 제도가 사라지면서 자연히 수실도 만들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도 합장을 위해 미리 자리를 예비해 둔 사례가 있었다. 숙종은 1701년(숙종 27)에 인현왕후(仁顯王后)의 능침을 조성하면서 허우지제(虛右之制)라 하여 왕후릉의 오른편을 비워 두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 김상협, 「조선 왕릉 석실 및 능상구조의 변천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 안경호, 「조선 능제의 회격 조성방법-장경왕후 초장지를 중심으로」, 『정신문화연구』제32권 제3호, 2009.
■ 이우종, 「조선 능묘 광중 지회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계획계, 제26권 제12호(통권 266호), 2010.
■ 조인수, 「조선시대 왕릉의 현상과 특징-명청대황릉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미술사학연구』제262호, 2009.

■ [집필자] 신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