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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는 1457년(세조 3)에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세조에 의해 부인(夫人)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1521년(중종 16)에 승하하였는데, 오늘날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에 있던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정미수(鄭眉壽) 집안의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 뒤 1698년(숙종 24)에 단종이 복위됨에 따라 부인은 왕후로 복위되었고, 그의 무덤 역시 능으로 추봉되어 ‘사릉’이라는 능호를 받았다[『숙종실록』 24년 11월 6일].
[조성 경위]
정순왕후는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딸로, 1454년(단종 2)에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에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상왕으로 물러나면서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가 되었고, 1457년(세조 3) 사육신 사건을 계기로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됨에 따라 부인으로 신분이 격하되었다. 이후 1521년(중종 16) 6월 4일에 승하하여 해평군 정미수 집안의 묘역에 묻혔다.
정미수는 문종의 딸이자 단종의 친누이인 경혜공주(敬惠公主)의 아들이다. 전에 부인이 그를 시양자(侍養子)로 삼았는데, 1512년(중종 7)에 먼저 세상을 떠난 까닭에 그녀의 상례는 정미수의 아들 정승휴(鄭承休)가 주관하였다. 나라에서는 대군(大君)의 예에 맞추어 부의하고 제물을 내렸다. 이때 조성된 묘소에는 문인석 1쌍과 장명등(長明燈), ‘노산대군부인송씨지묘(魯山大君夫人宋氏之墓)’라고 적힌 표석이 세워졌다. 그 뒤 1609년(광해군 1)부터 관에서 부인의 묘를 관리하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였고, 1674년(현종 15) 1월에는 수묘군(守墓軍)을 두고 제전(祭田)을 지급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698년(숙종 24)에 노산대군이 단종으로 복위되면서 부인 역시 정순왕후로 추봉되었고, 아울러 부인의 묘는 사릉으로 격상되었다.
[조성 상황]
1698년에 정순왕후가 복위된 뒤 곧바로 사릉을 조성하기 시작해, 이듬해에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그런데 왕과 왕비의 능은 대개 그 격에 맞추어 장소와 크기가 정해지는 데 비해, 사릉은 사가(私家)의 묘역에 조성된 무덤을 능으로 추봉한 것이다. 그 때문에 기존에 함께 있던 정미수 집안의 묘소를 처리하는 방법이 문제가 되었다. 이때 정씨 집안의 무덤들을 옮기지 않고 석물만 제거한 채 그대로 두었으며, 산 아래에서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하였다.
사릉의 원경(圓徑)은 후릉(厚陵)의 제도를 따랐으며, 상석(象石)의 설치는 정릉(貞陵)과 경릉(敬陵)의 형식을 따라서 단출하게 조성하였다. 병풍석과 난간석은 설치하지 않았고, 봉분 주변에 양석(羊石)과 호석(虎石)도 2개씩만 두었다. 또 능 앞쪽에 는 무인석과 마석은 생략하고 문인석과 마석(馬石)만을 세웠다.
한편 단종과 정순왕후는 복위되었으나, 종묘 정전에 배향되지 않고 별묘인 영녕전에 봉안되었다. 단종이 정전에서 제사를 받을 수 있는 4대를 이미 넘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따라 이들의 능제(陵祭) 역시 영녕전에 있는 선왕의 예와 같이 한식제(寒食祭)만을 거행하였다.
[관련 사항]
1736년(영조 12) 8월 29일에는 영조가 사릉에 행차하여 봉심하였다. 1791년(정조 15)에는 정조가 사릉에 행차하였는데, 이때 정운기(鄭運耆)를 이곳 참봉으로 제수하였다. 정운기는 정미수의 후손이다. 이것은 불운한 시기에 정순왕후를 돌봐 주고 제사를 받든 정씨 일가에 대한 답례이자, 군신 간의 의리를 표창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