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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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장(曲牆)

서지사항
항목명곡장(曲牆)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능원(陵園)
동의어곡장(曲墻)
관련어대석(臺石), 성석(星石), 원장(垣墻)
분야왕실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① 능원의 봉분과 석물의 좌우 및 뒤쪽까지 삼면에 둘러친 낮은 담장.

② 궁성 문 곁에 설치한 구부러진 담장.

[개설]
능원의 봉분 주위에는 먼저 석물을 배치하고, 그 외곽에 개방한 전면을 제외한 삼면을 담장으로 에워싸는데, 이 담장을 곡장이라고 한다. 에워싸는 형태는 여러 종류인데, ⨅형을 기본으로 모서리를 다양하게 꾸며 오각, 육각, 칠각 등으로 만든다. 조선시대에 왕릉을 조성할 때 표본으로 삼은 고려 공민왕의 능에는 ⨅형으로 곡장이 둘러져 있으며, 조선 왕릉에는 오각형으로 이루어진 곡장이 많다. 대개 곡장은 가공한 장대석으로 지대석을 쌓고, 그 위에 전돌이나 기와 조각으로 담을 쌓은 다음, 상부는 기와를 올려 마감하였다. 담벼락은 성석(星石)이라 부르는, 원형으로 가공한 석재를 일정한 간격으로 번갈아 꽂아 장식하였다. 성석은 이름에서 나타나듯, 해와 달과 별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용 및 특징]
곡장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에 처음 등장하는데, 능실의 제도에 봉분 동·서·북 삼면에 두르는 담장은 원장(垣墻)으로, 동서 방향으로 구부러진 부분은 곡장으로 구분하였다[『세종실록』 28년 7월 19일]. 하지만 이후 기록에서는 대부분 봉분 주위에 두른 담장을 곡장으로 표현하였다.

곡장의 규격은 능원의 상황에 따라 달랐다. 1600년(선조 33)에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인산(因山)을 앞두고 담당 관리 등으로 하여금 여러 능의 제도를 두루 살피게 했는데,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은 의물(儀物)을 설치해 놓은 곳의 거리와 너비가 원래 일정한 규정이 없어 모두 같지 않고 혈이 있는 언덕의 산세에 따라 정하였으므로 일일이 자로 재어서 결정할 필요는 없다고 아뢰었다[『선조실록』 33년 11월 13일]. 또 1611년(광해군 3)에도 봉릉도감(封陵都監)에서 여러 능의 규모와 제도를 조사했는데, 각 능의 봉분 중에 지름이 큰 것은 40여 자이고 작은 것은 20여 자이었으며, 곡장 내부의 폭도 넓은 것은 70여 자이고, 그다음은 60여 자, 좁은 것은 50여 자로 일정하지 않았다[『광해군일기』 3년 3월 24일].

[변천]
1608년(광해군 즉위)에 선조(宣祖)의 능인 목릉의 곡장을 개축하였는데, 부스러진 잡석을 섞어 쌓은 외면의 대석(臺石)을 모두 바꿔 쌓았다[『광해군일기』(중초본) 즉위년 8월 20일 6번째기사]. 이를 보면 목릉의 곡장은 장대석이 아니라 잡석을 썼다가, 이때 장대석으로 교체한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천재지변으로 인해 곡장과 사초(莎草)가 무너지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그래서 1788년(정조 12)에 편찬된 『춘관통고(春官通考)』에서는 이런 일을 당했을 때 취해야 할 대책을 세부적으로 규정해 놓았다. 이처럼 파손과 수리가 반복되면서 조선시대 왕릉의 곡장은 대부분 줄눈 모양이 바뀌고 줄눈 표면에 장식한 문양도 사라졌는데, 다행히 인조의 능인 장릉(長陵)의 곡장에는 운문(雲紋), 즉 구름무늬가 일부나마 남아 있다.

[참고문헌]
■ 『춘관통고(春官通考)』
■ 김상협, 「조선 왕릉 석실 및 능상구조의 변천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 이희중, 「17, 8세기 서울 주변 왕릉의 축조, 관리 및 천릉 논의」, 『서울학연구』17, 2001.

■ [집필자] 이경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