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태실의 주인이 왕으로 즉위한 뒤 태실 주변에 난간석과 비석 등을 새로 조성하는 의식을 일컫는다. 태실가봉에는 많은 인원과 물품이 필요하였다. 특히 석재를 구하여 태실이 위치한 태봉(胎峰)까지 옮기는 데 많은 인력이 동원되었다. 그 때문에 태실가봉은 흉년을 피해서 주로 농한기인 가을 추수 후에 이루어졌다. 왕의 태실을 가봉한 뒤에는 태실을 보호하기 위한 금표(禁標)도 200보에서 300보로 거리를 늘려 세우고, 수호하는 군사의 정원도 8명으로 증원하였다. 태실을 보호하기 위해 인근의 밭과 집을 금표 밖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백성들은 삶의 터전을 잃기도 하였다. 태실가봉이 끝나면 『태실가봉 의궤』를 제작하였고, 태실가봉 후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 태봉도를 왕에게 바쳤다.
[내용 및 특징]
태실가봉은 태실 주변에 석난간·개첨석·중동석·상석·전석·표석·귀롱대(龜籠臺) 등과 같은 석물을 새로이 조성하는 의식이었다. 그래서 태실에 돌로 만든 난간을 세운다는 의미에서 ‘태실석난간조배(胎室石欄干造排)’라고도 하였다. 태실가봉은 태실의 주인이 왕이 되는 경우에만 행해졌다. 다만 정조는 예외적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태실을 가봉하였다[『정조실록』 9년 3월 18일].
왕이 즉위하면 신하들의 요청에 따라 기존의 태실[阿只胎室]을 왕의 체모에 걸맞게 가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명종은 이 원칙대로 1546년(명종 즉위년) 5월에 태실을 가봉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즉위한 뒤 수년이 지나서야 태실을 가봉하였다. 태실 주변에 석물을 더하는 태실가봉은 300명 이상의 많은 인원이 동원되어야 하는 왕실의 큰 역사였다. 1801년(순조 1) 10월에 강원도 영월에 위치한 정조의 태실을 가봉할 때는 강원도에서 1700명, 충청도에서 2508명의 부역군(赴役軍)과 예석군(曳石軍)이 동원되었다. 그런 까닭에 백성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줄이기 위해 농번기나 흉년을 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재위 7~8년이 지난 뒤에 태실을 가봉하게 된 것이다. 현종의 경우 즉위 초부터 태실가봉에 대한 신하들의 청이 있었으나, 계속되는 흉년으로 인해 재위 기간 동안에는 이를 이루지 못하였다[『현종실록』 3년 6월 23일]. 현종의 태실가봉은 1681년(숙종 7) 10월에 가서야 실현되었고, 1684년(숙종 10) 정월에는 숙종의 태실가봉이 이루어졌다.
태실가봉은 관상감과 선공감에서 주로 담당했으나, 대부분의 인력과 필요한 물건들은 태봉이 위치한 인근 지방의 협조를 통해 조달하였다. 태실을 가봉할 때 가장 중요하고도 힘든 일은 석물을 조성하기에 적합한 돌을 구하여 태봉 근처까지 옮기는 일이었다. 석재는 대개 한양에서 활동하는 석수인 경석수(京石手)를 파견하여 태봉 근처에서 구하도록 했으나, 여의치 않을 경우 충주와 같이 좋은 석재가 많이 나는 지방에서 옮겨 오기도 했다.
태실을 보호하기 위한 금표는 원래 태실에서 200보 거리에 세웠으나 태실가봉 후에는 300보로 거리를 늘리고, 태실을 수호하는 군사도 원래 2명에서 6명을 추가하여 8명을 배치하도록 하였다.
지방관들은 태실을 가봉하는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태실의 신과 토지의 신에게 사유를 고하는 제사를 각각 올리고, 태실가봉이 끝나면 토지의 신에게 사례하는 제사를 지냈다.
태실가봉이 끝나면 『태실가봉 의궤』를 작성하였는데, 어람용 1건과 예조 보관용 1건, 관상감 1건, 감영 1건, 본관(本官: 태실이 조성된 지방관아) 1건 등 총 5건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가봉한 태실 주변의 산세를 그린 태봉도를 왕에게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