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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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古文)

서지사항
항목명고문(古文)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문체(文體)
하위어당송고문(唐宋古文), 진한고문(秦漢古文)
관련어시문(時文), 금문(今文), 한구정맥(韓歐正脉), 문필진한(文必秦漢), 시필성당(詩必盛唐)
분야문화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모범으로 삼을 만한 옛글, 또는 나라의 전장(典章)이나 특정 사안을 시행하는 데 근거로 삼을 만한 옛글.

[개설]
고문(古文)은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시간적으로 오래된 옛글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모범 또는 전범으로 삼을 만한 이상적인 글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으며, 시문(時文) 또는 금문(今文)에 대가 되는 글을 가리키기도 한다. 상황에 따라 우리나라 글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중국의 글을 나타내기도 하며, 조선시대 후기에는 공자의 옛집에서 발견되었다는 고문 육경(六經)을 가리키는 제한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의 고문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중국의 고문 운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 당나라 때의 문장가 한유(韓愈) 등은 위진 남북조 이래로 통용되던 사륙변려문이 알맹이는 없이 수사(修辭)에만 치중하는 것을 개탄하며, 선진(先秦)·양한(兩漢)시대의 옛글에 담긴 정신을 되찾자는 고문 운동을 전개했다. 이때 고문은 변려문이 사용되기 전인, 선진과 양한시대의 질박한 산문을 뜻한다.

한유와 유종원을 비롯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노력으로 고문 운동이 일정한 성과를 거두면서, 이른바 당송고문(唐宋古文)의 새 흐름이 형성되었다. 이들이 성취한 고문은 선진과 양한의 산문 정신을 이어받되, 완전히 새로운 표현력을 갖춘 개성적인 문체였다. 이후 명나라 때는 고문을 익힐 때 선진·양한시대의 고문과 당송고문 중 어디에 지향점을 두어야 할 것인지를 두고 끊임없는 논쟁이 이어졌다. 그에 따라 선진·양한시대의 질박한 고문을 숭상하는 진한의고문파(秦漢擬古文派)와, 도학의 정신에 바탕을 두어 문도합일(文道合一)의 문장을 추구한 당송고문파(唐宋古文派)로 나누어졌다. 또한 옛글의 모방을 거부하고 ‘지금 여기’의 정신을 담을 때만 진정한 고문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주장을 내세운 창신파(創新派)가 등장하였다. 고문론의 역사는 이 세 가지 흐름 위에서 전개된다. 이런 경향은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문이라는 용어는 문장의 맥락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쓰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대개 ‘현재의 일을 판단하는 근거로 삼을 만한 중국 고전’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밖에 우리나라의 글과 대비되는 중국의 옛글을 통칭하는 의미로 쓰이기도 했다. 19세기에 청나라의 고증학이 전래된 뒤에는, 공자의 옛 사당에서 발견되었다는 『고문상서(古文尙書)』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고문은 문맥에 따라 전혀 다른 지시적 의미를 지닌 복합적인 용어로 쓰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사용된 고문은 대부분 중국의 옛 기록을 통칭하는 개념에 가깝다. 예컨대 1417년(태종 17)에 예조에서 친향(親享)하는 절차를 보고한 기사에 나오는 것이 그 예이다. 이때 태종이 "고문에 상고하여 아뢰라."고 하자, 변계량은 송나라 고종 때의 사례를 들어 보고하였다[『태종실록』 17년 12월 14일].

1432년(세종 14)에 세종은 과거 시험장에 서책을 숨겨 들어가는 자들에 대해 응시를 정지시킬 것을 명하면서, "생도(生徒)들이 평소에 고문은 강습하지 아니하고, 과거에 응시하는 때에 이르러 책을 숨겨 함부로 들어가는 폐단이 다시 전일(前日)과 같게 되었으니, 거듭 밝혀서 고찰하도록 하라."고 하였다[『세종실록』 14년 3월 11일]. 이때 고문은 사서삼경과 주요 역사 경전을 아울러 일컫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과거 시험 준비에 기본이 되는 기초 경전과 역사책, 주로 선진과 양한 시대의 고문이 여기에 해당한다.

한편 1605년(선조 38)에 남근(南瑾)은 "요즈음 사람들은 전혀 고문을 배우지 않고, 다만 동시(東詩)로 전업을 삼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문체가 날로 저하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선조실록』 38년 11월 3일]. 남근이 말한 고문은 동시(東詩)에 대가 되는 표현으로, 산문이 아닌 중국 한시를 가리킨다.

[변천]
우리나라에서 고문이 본격적인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조선시대 중기 이후이다. 흔히 학자들은 고려시대 김부식의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나 「온달전(溫達傳)」을 고문의 걸작으로 꼽고, 명문장가 이제현을 해동 고문의 창시자로 일컫는다. 하지만 고려시대 말기에 정주학(程朱學)이 보급된 이래로 문장은 주소어록체(注疏語錄體)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후 조선 선조 연간에 이르러서야 명나라 전후칠자(前後七子)의 문장은 반드시 진한의 것을 따르고 시는 반드시 성당의 것을 따른다는 ‘문필진한(文必秦漢) 시필성당(詩必盛唐)’의 복고적인 문학관이 소개되면서, 비로소 문장에서 고문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진한의고(秦漢擬古)에 가까웠던 문장 인식은 선조 때 월상계택(月象谿澤)으로 불린 이정구·신흠·장유·이식 등 한문 사대가에 의해 문도 합일에 바탕을 둔 중후하고 표현력이 강화된 당송고문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이후 김창협 등에 이르러 문체에 대한 인식이 구체화되고, 작법에 대한 논의도 활발해졌다. 또한 ‘정주학문(程朱學問) 한구문장(韓歐文章)’의 방향을 앞세운 이른바 ‘한구정맥(韓歐正脈)’ 논의를 통해 경술에 바탕을 둔 의리(義理) 문장을 중시하게 되었다.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박지원 등을 중심으로, 삶의 토대 및 의식의 변화를 반영하는 새로운 고문 인식이 싹텄다. 그들은 한유가 선진과 양한의 고문을 배워 그와는 전혀 다른 당송고문을 만들어냈듯, 고문을 두루 익히되 우리 시대의 목소리를 담아야만 진정한 의미의 고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시문이 곧 고문이 되는 의미 전환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후로도 고문을 둘러싼 논쟁은 위의 세 관점이 지속적으로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저마다 자신의 관점으로 고문의 당위를 역설하는 방식으로 구한말까지 진행되었다.

[참고문헌]
■ 김도련, 『한국고문의 원류와 성격』, 태학사, 1998.
■ 김도련 편, 『한국고문의 이론과 전개』, 태학사, 1998.
■ 정민, 『고전문장론과 연암 박지원』, 태학사, 2010.
■ 정민, 『조선후기 고문론 연구』, 아세아문화사, 1989.
■ 강명관, 「16세기 말 17세기 초 의고문파의 수용과 진한고문파의 성립」, 『한국한문학연구』18, 1995.

■ [집필자] 정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