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한문 문체 가운데 하나인 ‘지(志)’는 지(誌) 또는 기사(記事)라고도 한다.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할 때, 특히 역사서에서 예악(禮樂), 지리(地理), 병형(兵刑) 등을 기록할 때 주로 사용하였다. 『주례(周禮)』 「춘관(春官)」에는 "소사가 나라의 지(志)를 맡는다."고 기록되어 있고, 육조시대 양(梁)나라의 유협(劉勰)은 『문심조룡(文心雕龍)』 「사전(史傳)」에서 "오직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는 표현과 내용이 분명하고 넉넉하니, 순욱(荀勖)과 장화(張華)가 사마천과 반고에 비긴 것은 망령된 칭찬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당나라의 유종원은 『영주철로보지(永州鐵爐步志)』에서 "그 말을 아름답게 하여 채록할 만한 것은 기록하여 지(志)로 삼는다."고 하여 지의 성격을 설명하였고, 명나라의 서사증(徐師曾)은 『문체명변(文體明辨)』 「기사(記事)」에서 "기사란 지(志)의 다른 이름이니, 야사(野史)의 유이다."라고 지를 정의하였다.
[내용 및 특징]
지는 일을 기록한다는 성격으로 인해 기(記)와 유사한 형식적 특성을 갖는다. 예를 들어 조선 인조 때의 명신인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택풍당지(澤風堂志)」는 제목에서 지를 표방하고 있지만 기와 동일한 방식으로 기술하고 있어, 지와 기의 차이를 무색하게 만든다. 다만 기는 서술 대상의 시말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제시하는 데 주력하는 경향을 보이고, 지는 서술 대상에 얽힌 숨은 사연이나 내용, 특히 거기서 얻은 경험이나 교훈 등을 간략하게 기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가 문체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반고가 『한서(漢書)』에 10편의 지를 편성하면서부터이다. 「율력지(律曆志)」와 「예악지(禮樂志)」 등으로 이루어진 10편의 지는 내용이 풍부할 뿐 아니라 전아함을 갖추고 있어서, 이후 역사 서술의 전범이 되었다. 당나라 때의 학자 안사고(顔師古)는 『한서』에 주석을 달면서, 이 지를 기사(記事)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한편 과거의 사관들은 역사를 기술하면서,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경우가 아니면 사실을 누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문인 학사들은 이렇게 누락된 사실들을 수시로 적어 두었다가 사관에게 제공하기도 하였다. 역사에서 빠지기 쉬운 부분들이 지를 통해 채워졌던 것이다.
[변천]
지는 기전체 역사서를 구성하는 주요 문체 중 하나이다. 그런 까닭에 『조선왕조실록』에서도 기전체 역사서와 관련된 기사에서 자주 언급되었다. 1449년(세종 31)에는 춘추관에서 『고려사』에 대해 논하면서, "『사기(史記)』를 짓는 체는 반드시 기(紀)·전(傳)·표(表)·지(志) 등이 있어서, 사적을 갖추어 실어 각각 조리가 관통됨이 있어야 하니, 사마천과 반고 이후로 모두 이 체를 이어받아 고치는 이가 없다."고 하였다[『세종실록』 31년 2월 5일]. 또 1451년(문종 1)에는 김종서 등이 새로 편찬한 『고려사』를 바쳤는데,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연표(年表) 2권, 열전(列傳) 50권, 목록(目錄) 2권으로 되어 있었다고 하여 지를 언급하였다[『문종실록』 1년 8월 25일].
『삼국사기』와 『고려사』 등 기전체를 표방한 역사서를 통해서도 지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8편의 잡지(雜志)가 편재되어 있다. 제1권은 제사(祭祀)와 악(樂), 제2권은 색복(色服)·거기(車騎)·기용(器用)·옥사(屋舍), 제3권~제6권은 지리지, 제7권~제9권은 직관지(職官志)로 구성되었다. 오행지(五行志)에 중심을 둔 『한서』와 예악지에 중점을 둔 『당서(唐書)』와 달리 『삼국사기』는 지리지에 큰 비중을 두고 있어 차이를 보인다.
또 다른 기전체 역사서인 『고려사』의 지는 천문지(天文志) 3권, 역지(曆志) 3권, 오행지 3권, 예지(禮志) 11권, 악지(樂志) 2권, 여복지(輿服志) 1권, 선거지(選擧志) 3권, 백관지(百官志) 2권, 병지(兵志) 3권, 형법지(刑法志)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려사』의 지는 사실을 분류해 실은 『원사(元史)』에 의거하고, 고려 인종 때 최윤의(崔允儀) 등이 편찬한 『고금상정예문(古今詳定禮文)』과 같은 고려 때의 책인 『식목편수록(式目編修錄)』 및 여러 사람의 잡록을 취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특히 예지(禮志)의 비중이 높은 것은 『고금상정예문』에 수록된 자료를 옮겼기 때문이다. 이들 지는 각각의 서문 뒤에, 다시 세부 내용별로 항목을 구분해 서술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각 항목에는 연월(年月)이 없는 일반 기사를 먼저 싣고, 연월이 기록된 역사 사실을 뒤에 실었다.
한편 지는 편년체 역사서의 한계를 보충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기능을 했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께서 강기(綱紀)를 제정하고 예악을 제작한 일이 매우 많으니, 의주(儀注)와 같이 마땅히 별도로 지(志)를 만들어 고열(考閱)에 편리하게 한다면, 실록이 번거롭고 용장(冗長)한 데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문종실록』 2년 5월 2일]라는 기록이 실려 있어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이는 번거롭고 쓸데없이 길어질 수 있는 편년체 서사의 단점을 지를 통해 보완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에 『세종실록』에는 오례·악보·지리지·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 등의 전문적인 자료들이 정리되어 실리게 되었다.
그밖에 다양한 지가 지속적으로 창작되었는데, 특히 『동문선(東文選)』에는 명편이라 할 만한 지들이 실려 있으므로 참고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