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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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장(樂章)

서지사항
항목명악장(樂章)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시가(詩歌)
동의어악사(樂詞)
관련어악부(樂府), 정도전(鄭道傳), 몽금척(夢金尺), 수보록(受寶籙), 납씨곡(納氏曲), 정동방곡(靖東方曲)
분야문화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초기에 제전(祭典)이나 연례(宴禮) 같은 나라의 공식 행사 때 궁중 음악에 맞추어 부른 시가(詩歌).

[개설]
악장(樂章)은 본래 중국에서 궁중의 공식 행사인 종묘사직에 대한 제사나 연회에 사용한 음악이다. 조선시대에는 새로운 나라를 세운 넓고 큰 기상을 드러내고, 새 왕조의 영원한 번영을 기원하고 축복하려는 목적으로 악장을 만들어 불렀다.

악장은 한문 악장, 현토 악장, 국문 악장으로 구분된다. 한문 악장은 한문으로 된 악장이고, 현토 악장은 한문 악장에 우리말 토를 달아 만든 중간 형태이다. 마지막으로 국문 악장은 우리말로 된 시가로, 본격적으로 창작된 우리말 노래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내용 및 특징]
1. 악장의 성립과 사회적 배경

조선이 건국되는 과정에서 고려의 멸망을 정치적·역사적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은 이성계를 역모를 꾀한 역적으로 몰았다. 그에 비해 조선 건국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 당위성과 필연성을 드러내고 왕조의 무궁한 발전을 염원하는 노래를 창작하였다. 이 노래들은 나라의 공식 행사에 사용되었는데, 이를 악장이라고 불렀다.

2. 악장의 종류

악장은 크게 한문 악장, 현토 악장, 국문 악장으로 나뉜다.

한문 악장은 온전히 한문으로 이루어진 악장으로, 조선시대 초기에 발생했다. 1393년(태조 2)에 정도전(鄭道傳)이 처음으로 지었다고 전하는데, 권근·하윤·변계량 등이 대표적인 작가이다. 이들은 주로 나라의 안녕과 송축을 노래한 작품을 창작했다. 형식적인 면에서는 기존의 한시 형식을 바탕으로 하는 3언 4구를 기본으로 하였다. 간혹 『시경(詩經)』의 형식을 모방하거나, 우리말 시가 형식으로 이루어진 작품도 있다.

현토 악장은 한문과 한글이 혼용된 악장으로, 한시를 현토화하면서 많은 작품들이 창작되었다. 원래 한문으로 전하던 시가 『악장가사(樂章歌詞)』나 『악학궤범(樂學軌範)』에 현토체로 정착한 경우이다. 조선 건국의 당위성과 올바른 정치를 예찬하는 내용이 많으며, 불교를 찬양하는 노래도 만들어졌다.

국문 악장은 한글로 된 창작 악장으로, 본격적으로 창작된 우리말 노래라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등이 여기에 속한다. 특히 이 두 작품은 한글의 실용성을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변천]
악장은 중국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원래 공식적인 행사에서 부르는 노래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상(喪)을 당했을 때 마지막 순서로 읽었으나 그 의미가 바뀌어 노래로 불리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처음 정도전이 천명을 받은 인군의 공덕을 「몽금척(夢金尺)」, 「수보록(受寶籙)」, 「납씨곡(納氏曲)」, 「정동방곡(靖東方曲)」 등의 여러 악장으로 지어 바쳤다[『태조실록』 2년 7월 26일]. 고려 때 쓰던 옛 제도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사직과 원구단과 문묘 제향 때의 악장을 개작하였고[『태조실록』 4년 11월 16일], 하륜과 변계량은 악장을 지어 부르게 하였다[『태종실록』 12년 1월 29일] [『세종실록』 즉위년 11월 3일].

세종조 때에는 음악과 악장을 정비하고자 하였다. 이에 이전 창작 위주로 한 개인 제작의 악장에 이어서, 고대의 노래를 채집하는 법에 의거하여 각 도와 각 고을의 악장을 모두 찾아내어 올리라고 하였다[『세종실록』 15년 9월 12일]. 이러한 악장의 정비로 말미암아 변격의 작품들이 악장의 범주에 들게 되면서 악장은 정격과 변격을 아우르게 되었고, 이에 「용비어천가」와 같은 조선 악장도 창작하게 되었다. 세종은 「용비어천가」의 창작을 위해 경상도와 전라도관찰사에게 태조가 왜구를 소탕한 상황을 자세히 기록해 올리라고 명하였고[『세종실록』 24년 3월 1일], 그 기록을 바탕으로 권제(權題)·정인지(鄭麟趾)·안지(安止) 등이 「용비어천가」 10권을 지어 바쳤다. 「용비어천가」는 태조의 공덕뿐 아니라 태조의 4대 조상인 목조·익조·도조·환조 등의 공덕도 아울러 기술하고 있는 작품이며,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조선의 모습을 언급하고 있다[『세종실록』 27년 4월 5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용비어천가」를 교정하여 인쇄하였고, 마침내 1659년(효종 10)에 간행하였다[『효종실록』 10년 3월 18일].

「용비어천가」는 태조 즉위 이전의 사적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편년체로 서술하지 않았기 때문에 앞뒤의 순서가 일정하지 않아 자세히 살피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이에 지중추부사 홍양호(洪良浩)가 다시 「용비어천가」의 내용을 개인적으로 뽑아 연대별로 분류한 뒤 관련 사건들을 묶어 기술하기도 했다[『정조실록』 23년 12월 21일].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70권 志 24
■ 『예기(禮記)』
■ 「곡례(曲禮)」 下
■ 국어국문학회, 『고려가요·악장연구』, 태학사, 1997.
■ 김명준, 『악장가사연구』, 다운샘, 2004.
■ 김흥규, 『한국문학의 이해』, 민음사, 2001.
■ 성기옥 외, 『고전시가론』,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2010.
■ 조규익, 『조선조 악장의 문예미학』, 민속원, 2005.
■ 조동일 외, 『한국문학강의』, 길벗, 1994.

■ [집필자] 박수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