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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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柴地)

서지사항
항목명시지(柴地)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전제(田制)
하위어공해전시(公廨田柴), 무산계전시(武散階田柴), 별정전시(別定田柴)
관련어양반구분전(兩班口分田), 전시과(田柴科), 과전법(科田法)
분야경제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고려시대에 땔감, 숯, 꼴 등을 마련하던 곳.

[개설]
고려시대 시지는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개인 사유지로서의 시지이다. 이는 개인들이 땔감 등을 확보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산림으로, 개경이나 지방 어디에나 있었다. 다른 하나는 지방 관청이나 사원(寺院), 궁원(宮院) 등의 운영 경비로 지급된 시지가 있었다. 공해전시(公廨田柴)가 그것으로, 이 역시 해당 관청의 소재지와 관련해 개경과 지방 어디에나 있었다. 세 번째는 주로 양반층에게 지급한 전시과에서의 시지이다. 이때 시지는 양반구분전과 마찬가지로, 관료들이 개경에 머물 때 필요한 생활경비를 충당하도록 지급한 것이었다. 따라서 개경에서 이동하는 데 최대 2일 이내의 거리에 있는 산림을 지급하였다. 전시과 체계 내에서 지급되던 시지는, 과전법 실시와 함께 폐지되었다.

[내용 및 특징]
전시과에서는 전지(田地)와 함께 시지를 나누어 받았다. 그러나 전시과를 받는 모든 사람이 시지를 받는 것은 아니었다. 고려 문정 때 실시한 토지제도인 갱정전시과에 따르면 일반전시과의 제14과 이상에 배정된 양반관료, 무산계전시(武散階田柴)와 별정전시(別定田柴)의 제1등급에 배치된 소수의 무산계 소지자 및 대덕(大德) 즉 승려들만이 시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속(吏屬)과 군인, 한인(閑人)들은 시지를 지급받지 못했다. 따라서 시지는 주로 양반관료에게 지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시지가 개경에 거주하는 관료들의 식량 조달을 위해 지급했던 양반구분전과 유사한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시지는 지급받은 자가 거주하는 개경 근처의 경기에 주로 설치되었다. 즉, 시지로 설정된 지역이 개경에서 2일 일정을 넘지 않도록 규정하였다. 운송상의 편의를 고려해야만 했던 것이다.

시지는 과전과 같은 성격의 토지였기 때문에, 지급받은 자의 사유지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시지를 받았던 자가 죽으면 전지와 함께 시지도 모두 관에 반납하도록 하는 방침이 수립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시지는 사유지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타인의 이용을 금하는 독점행위는 허용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개 시지는 백성과의 공동 이용을 전제로 한 무주공산(無主空山), 즉 국유지에 설정되었거나 개인 소유의 산지에도 배정되었다. 양반관료들은 그러한 공동이용을 전제로 땔감이나 숯을 수취할 수 있는 권리를 실현할 수 있었다. 즉 양반 전주는 분급받은 시지의 주변에 거주하는 농민에게 그것을 이용하게 하고, 그 대가로 일정한 양의 땔감이나 숯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변천]
976년(고려 경종 1)에 제정된 시정전시과에서는 전시과 분급 대상 모두에게 시지가 주어졌다. 전시과는 자삼(紫衫)·단삼(丹衫)·비삼(緋衫)·녹삼(綠衫)의 사색공복(四色公服)에 따라 관료들을 4계층으로 구분하여 지급되었는데, 가장 상위인 자삼을 입는 계층의 경우 모두 18품이 있었다. 이 중 1품에서 14품까지는 지급받는 시지의 면적이 전지와 동일하였다. 예를 들어 1품은 전 100결, 시 110결, 14품은 전 45결, 시 45결을 지급받았다. 그리고 15품에서 18품까지는 전지에 비해 각각 2, 4, 6, 7결씩이 적었다. 15품은 전 42결, 시 40결, 18품은 전 32결, 시 25결이었다. 단삼·비삼·녹삼을 입는 문반과 무반, 잡업(雜業)의 경우도 최하의 품까지 모두 시지가 지급되었다. 다만 각 품마다 전지에 비해 최고 11결에서 최하 5결 정도씩 적게 배정되었다.

목종·문종대에, 전시과가 다시 개정전시과와 갱정전시과로 재편되면서 시지의 분급 결수는 전지에 비해 현저하게 감축되고, 하위의 과에는 지급되지 않았다. 998년(고려 목종 1)의 전시과에서는 전지에 비해 시지가 대략 최고 30결에서 최하 20결 정도씩 감축되었고, 16과 이하에게는 지급되지 않았다. 가령 제1과에게는 전 100결, 시 70결, 제9과에게는 전 60결, 시 33결, 15과에게는 전 30결, 시 10결이 각각 지급되었다. 대체로 전지 결수의 3분의 1 정도가 적었다. 1076년(고려 문종 30)의 갱정전시과에서는 시지가 더욱 축소되어 전지에 비해 대략 최하 2분의 1에서 최고 6분의 1 정도에 머물렀다. 전지에 비해 최고 50결, 최하 25결 정도가 적었다. 1과는 전 100결, 시 50결, 14과는 전 30결, 시 5결이었고, 15과 이하는 분급하지 않았다.

전시과가 개편을 거듭하면서 시지의 분급 결수는 감축되고 지급 대상도 축소되어 갔다. 특히 하위관료들부터 지급이 중단되었다. 이렇게 시지 지급 대상이 줄어들게 된 배경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관료제와 군현제가 점차 정돈되어 가고 이에 따라 국가의 호족층에 대한 통제력도 증대하면서, 시지에 대한 양반층의 지배와 수취를 제한하는 형태로 정책을 추진했던 데서 하나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 농민들의 시지, 즉 산림 이용에 대한 욕구가 증대하고 있었던 것도 또 다른 요인일 수 있다. 농민의 산림 이용 욕구는 땔감이나 숯 등을 자유롭게 채취하는 것 못지않게, 농지를 확보하고자 하는 측면도 있었다. 인구 증가와 토지 겸병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새로운 농지의 개척은 반드시 필요하였다. 농지를 확보할 수 있는 방도는 여러 가지였지만, 그중 하나가 산지를 개간하여 산전(山田)으로 경영하는 것이었다. 특히 빈농이나 몰락농민에게는 절실한 문제였다. 이리하여 시지의 개간이 널리 진행되었고, 이에 따라 시지를 채취하는 산림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시지 지급 대상 역시 축소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391년(고려 공양왕 3) 과전법의 시행과 함께, 시지 지급제도는 폐지되었다. 과전법은 전시과제도의 연장선상에 있었지만, 지급 지역을 경기로 한정하였다. 이에 따라 양반관료들의 생활경비로 지급하였던 양반구분전과 시지의 존립 근거가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에 존재하던 시지는 폐기되었던 것이다. 물론 조선을 건국한 초기 회암사 등 일부 사찰에는 여전히 시지를 지급하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1427년(세종 9)에 혁파하여 군자감에 소속시켰다.

[참고문헌]
■ 강진철, 『고려토지제도사연구』, 고려대학교출판부, 1980.
■ 김기섭, 「고려전기 농민의 토지소유와 전시과의 성격」, 『한국사론』17, 한국사학회, 1987.
■ 이경식, 「고려시기의 양반구분전과 시지」, 『역사교육』44, 역사교육연구회, 1988.
■ 홍순권, 「고려시대의 시지에 관한 고찰」, 『진단학보』64, 진단학회, 1987.

■ [집필자] 이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