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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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분세(鹽盆稅)

서지사항
항목명염분세(鹽盆稅)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잡세(雜稅)
동의어염세(鹽稅)
관련어해세(海稅), 절수(折受), 균역법(均役法), 염간(鹽干), 염호(鹽戶)
분야경제
유형법제 정책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소금 생산의 주요 수단인 염분에 부과된 세.

[개설]
고려와 조선은 아주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 자유로운 소금 생산을 허용하는 대신 일정액의 세금을 거두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조선중기 이후 염분에 대한 궁방과 아문의 절수가 성행하면서, 소금 생산에 대한 수세액이 대부분 궁방과 아문에 귀속되었다. 자연히 수세액도 일정하지 않게 되었다. 이후 균역법 시행에 따라 궁방과 아문에서 절수한 염분과 호조에서 수세하던 염분을 모두 균역청에 소속시키고, 균역법 시행으로 부족해진 재원을 충당하는 데 사용하였다. 이를 통해 염세의 체계적인 정비가 이루어졌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초기에는 귀족들이 사적으로 점유하고 있던 염분을 국가에 모두 환속시켰다. 그런 후 국가 수요에 충당하는 공염분(貢鹽盆)과 민간에서 자유롭게 소금을 생산하는 사염분(私鹽盆)으로 나누어 관리하였다. 전자는 신공으로 연간 소금 20석을 바치다가, 점차 줄어들어 10석, 8석으로 인하되었다. 후자는 연간 4석을 납부하였고, 그 세액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렇게 세금으로 거둔 소금은 모두 군자곡이나 진휼곡의 재원으로 활용하였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궁방과 아문에서 많은 염분에 여러 차례 세금을 징수하였다. 그 결과 국가 세입이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백성들의 세금 부담 역시 늘어났다. 이 때문에 궁방과 아문에서 절수받는 염분의 수를 제한하려는 시도도 있었고, 궁방 등에서 거두는 수세액을 염분 1좌당 연간 10석으로 제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도와 함께 궁방의 절수 자체를 혁파하고 모두 호조에서 일괄적으로 세금을 거두는 방안이 모색되었다. 그리하여 1717년(숙종 43)에는 염분 1좌당 4석을 거두도록 하고, 모든 염분에서 동일한 액수를 수취하도록 하는 규정이 마련되었다.

이후 균역법 시행 과정에서 해세 조항을 신설하여, 궁방과 아문의 절수로 인한 관부의 염세 수입 감소와 소금 생산자에 대한 수탈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게 되었다. 조선 정부는 균역법으로 양역을 1필로 균일화하는 한편, 그로 인해 빚어진 재정 부족분을 어염선세를 통하여 보충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균세사(均稅使)를 파견하여 소금 생산의 실상을 파악하고 그에 따라 염세에 대한 수세 규정을 정비한 해세 조항을 마련하였다.

[내용]
균역법 해세 조항에 나타난 염분세 부과 방식은 지역의 특성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경기도는 원래 염분 1좌마다 소금으로 1~4석을 거두었다. 이것을 소금 1석당 전(錢) 1냥 5전, 혹은 1냥 2전 5분으로 계산하고, 아울러 소요되는 경비를 추산하여 세액을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바닷물을 고우는 가마솥인 염부(鹽釜)의 크기를 대·중·소로 구분하여 세액을 정하였다. 황해도와 평안도는 염분에 과세하였다. 염분의 입지 조건 중에서 염전의 비옥도와 땔감을 마련할 수 있는 시장(柴場)과의 거리를 기준으로 4등급으로 구분하였다. 황해도는 최대 16냥에서 4냥까지 부과되었다. 평안도는 염분을 5등급으로 나누어 10냥에서 1냥까지 부과하였다. 충청도는 염분의 크기를 계산하지 않고 염전의 비옥도에 따라 8등분하였다. 세액은 10냥에서 4냥까지 부과하였다. 전라도는 자세한 규정을 두어 염세를 부과하였다. 세액을 정하는 기준은 우선 염분의 크기를 우선하였다. 아울러 염전 비옥도, 시장·어장·장시의 편리함에 따라 다시 1·2·3등으로 구분하여 총 9등급으로 분류하였다. 세액은 최소 1냥에서 20냥까지 부과하였다. 경상도 염세 규정은 매우 간단하였다. 염부를 토분과 동토분(童土盆), 철분과 동철분(童鐵盆)으로 구분하고, 토분과 철분은 6냥, 동토분과 동철분은 2냥씩 세액을 정하였다.

이처럼 균역법의 시행으로 염세의 과세 기준이 세밀해지고, 정액수세제, 생산 조건에 따른 차등수세제, 조세금납화 등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균역청으로 수세 기관이 일원화됨으로써 기존의 첩징과 남징의 폐단이 크게 완화되었다. 사사로운 징세가 부분적으로 재개되기는 하였지만, 염민들은 궁방이나 토호의 자의적인 수탈로부터 어느 정도 보호받을 수 있게 되었다.

[참고문헌]
■ 김옥근, 『조선왕조재정사연구Ⅱ』, 일조각, 1987.
■ 유승원, 『조선초기신분제연구』, 을유문화사, 1987.
■ 김의환, 「17·18세기 염세정책의 변동」, 『조선시대사학보』 6, 조선시대사학회, 1998.
■ 이욱, 「조선후기 어염정책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 [집필자] 이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