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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695년(숙종 21) 절수의 방식에 의하여 폭발적으로 늘어난 면세결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 취한 조치.
[개설]
절수(折受)는 주인 없는 땅[無主地]이나 황무지[陳荒地]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점차 민전을 침탈하는 양상을 띠어 백성의 원망이 거세지고 국가 재정에도 곤란함이 초래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마침내 ‘을해정식’을 제정하여 절수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면세결 확대에 제동을 걸기 시작하였다.
을해정식은 기존의 절수제를 폐지하는 대신, 돈을 주고 토지를 매입하도록 하는 급가매득제(給價買得制)와, 궁방·아문에 민전의 수조권만을 이양한 민결면세제를 채택하였다. 아울러 절수지의 규모를 제한하고, 새로이 궁방전을 택정(擇定)할 경우 지역의 경제적 상황을 충분히 고려한 후에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을해정식의 제정으로 궁방은 물론 군문·아문이 누리던 각종 특혜가 크게 제한받게 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왕조 정부는 미개간지·무주지 등에 대하여 절수를 허용해 주거나, 입안(立案)의 형태로 불하하여 궁방의 재정원으로 삼게 하였다. 궁방은 토지뿐만 아니라 어염(魚鹽)·시장(柴場) 등도 비슷한 방식으로 확보하였으며 여기에는 면세와 면역의 혜택이 주어졌다. 궁방전의 폭발적 증가와 이로 인한 면세지의 확대는 국가 재정을 곤란하게 하는 중대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더구나 원칙적으로 절수가 허용된 황무지·무주지 등이 꾸준한 인구 증가와 계속된 개간사업으로 인해 추가로 확보하기 어려워지자, 이제는 민전을 침탈하는 양상이 노골화되었다. 민전의 침탈은 주로 갑술양안(甲戌量案)상에 무주지나 공한지로 기재되어 있다는 핑계로 폭력적·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민전 소유자가 정규의 전세보다 낮은 지대를 기대하며 스스로 궁방에 투탁하는 형태도 있었다. 어떠한 형태이건 조선후기 절수 관행은 국가 재정을 좀먹고 민생을 멍들게 하는 중대한 요인으로 지목되었다.
왕조 정부는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절수제에 대해서는 현종조 이래 면세 결수의 제한이나 혁파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본격적인 개혁책이 마련된 것은 숙종대에 접어들어서였다. 숙종대에는 절수 문제를 둘러싸고 오랜 기간에 걸친 지리한 논의가 계속되었다. 이는 왕과 왕실, 궁방, 각 아문은 물론 정파별로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이었다. 1695년(숙종 21) 을해정식은 그러한 논의의 마무리였다.
을해정식의 핵심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숙종실록』 21년 7월 23일][『숙종실록』 21년 7월 28일][『숙종실록』 21년 8월 3일]. 우선, 절수제의 금지와 급가매득제의 적용이었다. 이제 각 궁방은 매입을 통해 토지를 확보해야만 하였다. 급가매득제의 채용은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른 토지 상품화의 진전을 배경으로 토지 확보 과정이 절수라는 형태의 정치적인 수단에서 경제적인 방법으로 전환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비록 일부 궁방의 경우에는 매우 제한적인 조치만 취해졌지만, 종래 사적 권력의 자의적인 운영에 의하여 국가 재정이 감축되고 민원을 불러일으켰던 절수가 을해정식을 통해 불법으로 규정된 것은 매우 중대한 의미였다. 아울러 민결면세제(民結免稅制)가 공식적으로 시행되었다. 민결면세제는 궁방의 소유권과 무관한 민전에서 호조수세분(戶曹收稅分)만을 궁방이 이양받은 형태였다. 이것은 후에 무토(無土)의 출현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다.
둘째, 궁방 재정에 대한 대체 재원을 마련할 수 없는 상태였기에 절수지의 규모를 대략 200결 단위로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절수라는 방식 자체를 부정하였음에도 이전의 절수지를 일거에 혁파할 수 없는 것은 이들 궁방에 대하여 별도의 재정지원이 곤란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궁방의 절수지 규모를 줄이고 일정 규모로 제한함으로써 궁방전의 확대를 막고 이후 궁방 재정의 통제 근거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셋째, 절수 폐지의 후속 조치로 선혜청과 군자감에서 일정 액수의 재원을 지원하여 장토(庄土)를 매입하도록 한 점이었다. 이는 재무관서인 호조와 선혜청의 재정 부담이 가중되는 부작용이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사재정적 성격이 강한 궁방이 재무관서의 지원에 의해 운영되도록 함으로써 왕실 재정에 대한 재정 통제의 근거를 마련하는 측면도 있었다.
넷째, 신궁(新宮)에서 장토 200결을 택할 경우, 잔읍(殘邑)이 아닌 대읍(大邑)에 설정하여 읍세(邑勢)가 약한 지역을 과중한 조세 부담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였다. 또 문권위조 여부를 면밀히 조사하여 민원의 소지를 줄이고자 하였다. 더구나 신결(新結)을 택할 경우 이를 해당 지역 수령과 함께 답험(踏驗)하도록 하여 군현제적 질서에 궁방 재정을 일정하게 포섭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을해정식은 국가 재정에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하던 왕실 재정에 대해 적극적인 규제책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재정 운영의 사적인 요소를 크게 탈각시킨 중요한 조치로 평가되었다. 왕권의 후광을 업고 있던 왕실 궁방은 물론 여타 군문·아문 등에도 적지 않은 파급을 가져와 이들이 행사하던 독립적인 재정 운영권도 함께 제한을 받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