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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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포(丁布)

서지사항
항목명정포(丁布)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군역(軍役)
관련어구전(口錢), 군포(軍布), 유포론(遊布論, 儒布論), 호포론(戶布論), 결포론(結布論)
분야경제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양역변통의 논의 과정에서 제기된 징포 방법으로 모든 양인 장정에게 일률적으로 부과하는 군포.

[개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오군영 체제가 확대되면서 양정(良丁)의 부족과 재정 궁핍으로 심각한 폐단이 초래되었다.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양정을 찾아내어 사망·도망·노제(老除)로 인한 군액의 결원을 충당하거나 군액 자체를 하향 조정하여 건실한 양정으로 채우는 방안이 논의되었다. 나아가 군역 대상자를 모든 양인호구에 확대하는 유포론(遊布論, 儒布論)·호포론(戶布論)·결포론(結布論) 등과 함께 모든 장정에게 군포를 부과하는 정포론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양반층에게도 역을 부과하는 것이었으므로 양반층의 거센 반발을 받아 시행되지 못하였다.

[내용 및 특징]
1711년(숙종 37)에 판중추(判中樞) 이이명(李頤命)은 그때까지 제시된 양역(良役)의 변통 방안이 부적절하다고 말하며 정포(丁布), 혹은 구전(口錢)이 가장 편리함을 주장하였다[『숙종실록』 37년 8월 17일].

기존의 양역변통(良役變通)에는 양역 부과 대상에서 누락된 자를 찾아내어 도망하였거나 죽은 자의 대신으로 채우고자 하는 양정수괄(良丁收括)의 논의가 제기되었었다. 그러나 이것은 인징(隣徵)과 족징(族徵)을 억제하는 효과는 있으나 한 사람에게 2필씩 거두는 고역에(苦役)에 대한 원망은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근본적인 대책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호포(戶布)의 의논에 대해서 이이명은 간사한 백성이 2~3호를 합하여 1호로 만들 것이며 줄어든 호에 호마다 1필을 내면 부담이 지나치게 많아진다고 하였다. 3등급으로 호등을 나누거나 빈부(貧富)에 따라 차등을 두는 것도 정하기가 어렵고 3등급을 다 1필로 하면 구별이 없으며, 차등을 두어도 상호(上戶)에 3필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양포(良布) 1필에 대해서 이이명은 지금 신역에 종사해야 할 양정에게 모두 1필씩 줄이면, 반드시 재정을 운영하는 경비가 모자랄 것으로 판단하였다. 우리나라의 풍속은 사람에 따라 차등이 많은데, 어느 등급으로 한정하여 거두어야 적당할지 알 수 없다는 점도 지적되었다.

결국 이이명은 구전(口錢), 즉 정포로 하는 것이 가장 낫다고 주장하며 그 연원을 중국의 한(漢)나라에서 찾았다. 즉, 한나라의 법은 15세부터 65세까지의 백성을 정(丁)으로 하고, 정은 부전(賦錢) 120문(文)을 냈는데, 이때부터 역대(歷代)에서 이를 따랐고, 모두 구(口)에 따라 부(賦)를 내었다고 하였다. 조선의 경우에는 인가(人家)에서 부를 내야 할 자는 많아야 6~7정에 지나지 않으므로 지금의 군역법(軍役法)에 따라 5에서 1을 면하면 한 집에 부를 내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다만 사족(士族) 이하 한가히 노는 무리가 각각 전에 없던 부를 내게 되면 반드시 원망하는 말이 있을 것이나, 이것은 이기적인 생각이며, 이런 원망은 오히려 백골(白骨)·황구(黃口)의 원망보다 낫다고 보았다.

이이명은 정포의 법을 시행하는 구체적인 조항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1.이 법을 시행한다면, 공노비(公奴婢)사노비(私奴婢)와 충신·효자·열녀 및 공신(功臣)의 적장자(嫡長子)와 종친(宗親)·문관(文官)·무관(武官)의 2품(品) 이상과 노약·병폐(病廢)·유개(流丐)·유장(柳匠)·포척(鮑尺)과 부모의 나이가 여든인 자와 당번(當番)하거나 장정(長征)하는 군졸은 다 부(賦)를 면제한다.

2. 정포는 15세 이상이 되어 부를 내므로 정(丁)이라 하고, 포로 바칠 수 있으므로 포(布)라 한다. 대개 전(錢)은 관가에서 나오는데, 구리[銅]는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므로 해마다 수백만 관(貫)을 내도록 요구할 수 없으나, 포는 토산(土産)으로 백성에게서 나오니, 한때에 많이 장만할 수 있다. 이제 두 사람이 함께 포 1필을 내면 합하여 전(錢) 240문이니, 곧 근년에 포 1필의 대전(代錢)을 1냥 5전으로 정한 것과 서로 비슷하다. 같이 사는 2정·4정은 힘을 합하여 함께 포를 바치고, 1정 또는 3정 중의 1정은 각각 부전(賦錢)을 바친다. 단정(單丁)인 두 호(戶)가 다 함께 포를 바치기를 바라면 허가한다.

3. 경외(京外)에 신칙(申飭)하여 군적에서 빠진 자를 처벌하는 법을 더 엄하게 해야 하겠으나, 양민(良民)이 그 역이 쉬워질 것이라는 것을 알면 엄하게 하지 않더라도 자수(自首)할 것이다. 또 어미의 역을 따르는 종모법(從母法)을 다시 시행하여 양구(良口)가 늘게 하면 오래 시행하여도 폐단이 없을 것이다.

4. 먼저 이번 식년(式年)의 장적(帳籍)에서 15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정(男丁)을 헤아려 그중에서 부역을 면제해야 할 자를 제외한다. 신포(身布)를 용도(用度)로 한 모든 것을 살펴서 수량을 헤아려 각각 남겨 두고, 그 나머지는 항식(恒式)을 정하여 그 총수(總數)를 받아들여야 할 정포(丁布)의 수와 비교하여 알맞고 모자라는 것을 조절하여 저축한다.

이이명은 정포와 관련하여 그 밖에도 중앙군병 300,000명을 선발하고 농민이 양병(養兵)을 돕는 등의 군제개혁을 제시하였다.

[변천]
이이명이 정포론을 제기하자 “양반과 같은 무리에게는 일찍이 1전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뒤섞어 베를 받아들인다면 원망이 일어날 것”이라는 이유로 무성한 반론이 제기되었다. 또 1정이 내는 돈이 120문이어서, 부담이 너무 과다하다는 비판도 있었다. 반대론자들은 대부분 정포나 호포 대신에, 각 종류의 긴요하지 않은 양역을 조금 줄이고, 정원 외의 교생으로 물건을 바치는 자들을 결원에 충당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참고문헌]
■ 정만조, 「肅宗朝 良役變通論의 展開와 良役對策」, 『국사관논총』 17, 국사편찬위원회, 1990.
■ 지두환, 「조선후기 戶布制 論議」, 『韓國史論』 19,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88.

■ [집필자] 손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