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문·무과나 잡과에 급제하고 아직 출사(出仕)하지 못한 사람을 일컬었다. 군역자를 파악하거나 시취(試取), 포호(捕虎) 등으로 포상할 때 무과 출신자는 주로 군관이나 군역 예비자인 한량과 함께 거론되었다. 조선후기에 출신은 무과 출신자를 주로 가리키며, ‘출신군관(出身軍官)’이라는 직역명도 나타났다.
[담당 직무]
과거 합격자인 출신자들은 시험 성적이 우수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품계만 있어서, 직사(職事)가 없는 산관직(散官職)인 권지(權知)에 임명되었다. 문과의 경우 갑과(甲科者) 합격자 3명은 즉시 서용되었지만 나머지 을과·병과 출신 30명은 정8품과 정9품의 품계(階)를 받고 성균관·교서관·승문원·홍문관 등의 권지로 나누어 배치되었다. 무과는 훈련원과 별시위에 권지로 배치되었다.
이들은 매달 월례 고사 성적과 근무 일수를 기준으로 하여 매년 인사행정인 도목정(都目政)을 거친 뒤 6품에 이르러서야 직무에 배치될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은 1425년(세종 7)에 마련되었다. 그 이전에는 비출신자(非出身者)도 권지가 될 수 있었다. 물론 이후에도 제생원·혜민국의 권지는 비출신자도 될 수 있었다.
다만 출신자는 비출신자보다 여러 가지 특전이 있었다. 잡과의 경우에 출신자는 참상관이 될 수 있었으며, 생원·진사 및 유직인(有職人)의 사례에 따라 의금부에서 심문을 할 때도 태장(笞杖)은 칠 수 없었다.
[변천]
출신은 과거시험에 합격한 자를 일컫는 일반적인 말이었으나, 조선후기에는 주로 무과 입격자를 가리키게 되었다. 생원진사과 합격자인 생원·진사와 대조적인 관계로 인식된 듯하다.
[참고문헌]
■ 『수교집록(受敎輯錄)』
■ 이성무,『朝鮮初期 兩班硏究』, 일조각, 1980.
■ 우인수, 「『赴北日記』를 통해 본 17세기 出身軍官 의 赴防生活」, 『韓國史硏究』 96, 韓國史硏究會, 1997.
■ 이성무, 「朝鮮初期의 技術官과 그 地位」, 『유홍렬박사화갑기념논총』, 유홍렬간행위원회, 1971.
■ 정해은, 「조선후기 武科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석사학위논문,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