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조선왕조는 모든 군현에 향교를 설치하고 지방 교육을 장려하였다. 향교에 입교할 수 있는 교생들의 신분은 개국 초기부터 양인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16세기 이후 강화된 양반 중심의 사회체제 속에서도 평민들이 교생의 상당수를 점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순력(巡歷)하는 관찰사에게 고강을 받아야 했으며, 여기에서 떨어지면 교생 신분을 박탈당하였다. 조선 정부는 국가 재정을 보전(補塡)하는 하나의 방안으로서 면강첩을 발매하였다. 이에 따라 군역(軍役)을 피해 향교에 입교한 상민층 교생들은 재물을 내고 면강첩을 구매하여 고강을 면제받고자 하였다.
[내용 및 특징]
『경국대전』에 의하면 향교의 교생들은 관찰사의 고강을 받아야 했다. 교생에 대한 고강은 학문과 과거(科擧)를 권장한다는 명분 속에 주로 액외교생(額外校生), 즉 향교의 정규 인원 밖에서 모집한 이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이것은 양정(良丁)을 모으려는 정책의 하나로, 군역변통의 한 방법으로 이용되었다. 고강에서 낙강한 교생은 그 신분이 박탈되었으므로, 양반이 아닌 상민층 교생들의 낙강은 군역 부담자로의 편입을 의미하였다. 결국 고강하여 낙강하면 곧 군역에 편입시킨다는 법제 하에서 납속 면강과 면강첩 판매가 가능할 수 있었다.
면강첩의 판매 대상은 대다수가 양민층인 향교의 액외교생들이었다. 이들은 면강첩을 구입하여 교생 신분을 유지하는 한편 군역을 면하고자 하였다[『인조실록』 4년 12월 12일]. 면강첩의 가격은 1661년(현종 2)의 「모속별단(募粟別單)」에 잘 나와 있었다. 액외교생을 대상으로 10년 동안 면강하는 가격과 종신토록 면강하는 가격이 지방에 따라 다르게 책정되었다.
<표 1> 1661년(현종 2) 지역별 면강첩 가격
※ 단위: 쌀, 석(石). --> 표가 없어요.
종신 면강첩은 10년 동안 고강이 면제되는 면강첩에 비해 가격이 2배 정도 높았다. 그리고 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 비해 관서 지역과 관북 지역에서 가격이 비싸게 책정되었다. 이는 액외교생의 신분적 측면이나 유교적 교풍의 강약에 지역적 차이가 있다는 인식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이러한 면강첩의 가격도 1663년(현종 4)이 되면 10년 동안 고강을 면제하는 면강첩은 쌀 4석, 종신 면강첩은 쌀 8석으로 통일되었다[『현종개수실록』 4년 9월 11일].
한편, 조선 정부는 면강첩 발매에 있어 엄격한 규제를 두기도 하였다. 즉 예조(禮曹)의 관인(官印)이 있는 것만 인정하고 지방 감사나 수령이 사사로이 발급한 것은 제재를 가하였다. 또한 발매 수량을 제한하여 면강첩의 남발을 방지하고자 하였다[『숙종실록』13년 11월 2일]. 그리고 1641년(인조 19)의 경우와 같이 구입 가능한 연령을 40세 이상의 교생들로 한정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면강첩 구매자들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지방관과 결탁하여 면임(面任)·향임(鄕任) 등에 진출하고 향반(鄕班)을 자처하면서 향촌사회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노력하였다.
[변천]
교생에 대한 면강첩의 판매는 선조·광해군대부터 확인되는데, 군량·진휼곡의 마련뿐 아니라 농사에 필요한 말과 소 등을 마련하는 데에도 활용되어 영조대까지 수시로 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