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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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호(養戶)

서지사항
항목명양호(養戶)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작부제(作夫制)
동의어대호(代戶)
관련어호수(戶首), 제역촌(除役村), 방결(防結), 작부(作夫), 주비(注非), 도결(都結)
분야경제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경작지를 조세 수취 단위로 구획하는 과정에서, 향촌의 토호가 자신이 내야 할 전세와 대동미 등을 다른 농민들이 대신 내도록 조작하던 관행.

[개설]
조선후기 대부분의 농민은 50부(負) 이하의 경작지를 소유한 소농·빈농층이었다. 이 때문에 수령이 농민에게 일일이 결세(結稅)를 징수하는 것보다 이를 하나로 묶어서 징수하는 것이 편리하였다. 또 대부분의 결세가 현물이었기 때문에 농민들도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개별적으로 현물을 납부하기보다는 공동으로 납부하는 것이 유리하였다. 이에 정부는 여러 개의 전결을 8결(結) 단위로 묶어 부(夫)라 하고, 부마다 중간 수납자로 호수(戶首)를 뽑아 부에 책정된 결세를 수납하게 하였다. 이를 작부제(作夫制)라 하였다. 작부제 운영 과정에서 토호(土豪)·서리 등에 의해 양호(養戶)·방결(防結) 등의 중간 수탈 구조가 형성되었다. 양호는 1명의 호수가 여러 부(夫)의 호수를 겸하는 것으로, 부세(賦稅)를 내야 할 토지를 가진 자만이 할 수 있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후기의 수취 체제는 8결을 1부(夫)로 하고, 농민 중 살림이 넉넉하고 부지런하며 성실한[饒實勤幹者] 1명을 호수로 선정하여 8결에 부과된 각종 납세액을 책임지고 거두게 하는 방식이었다. 여기에 토호나 관리가 교묘히 편승하여 스스로 호수가 되어 양호의 기능을 발휘하였다.

토호들은 타인의 토지를 취합하여 스스로 호수가 되거나 타인을 호수로 내세운 다음 해당 경작자에게 토지에 부과되는 결역(結役)을 과도하게 징수하였다. 그 후에 상당 부분을 관가에 납부하지 않고 자기의 수입으로 삼았다. 한편 향촌 서리들은 경작지를 8결 단위로 구획할 때, 일반 민결(民結)을 잡역을 면제 받는 제역촌(除役村)으로 옮겨 기재하는 방식으로 민결에서 내야 할 조세를 착복하였다. 그러고는 다시 그 민결에서 부담해야 할 조세는 다른 농민에게서 거두었다.

이와 같이 토호·서리 등은 경작지를 구획하는 과정에서 그 이익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양호의 규모는 많을 경우 거의 100여 결이었고, 적더라도 30~40결이었는데, 보통 1결에서 조 100두(斗)씩을 거두었다.

양호의 폐단은 비단 전세(田稅)에만 국한되지 않고 환곡(還穀)·군역(軍役) 관련 행정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다. 이들은 대부분 환곡을 받아서 전세(田稅)·대동미(大同米)·군포(軍布)전삼세(田三稅)를 납부하고는 가을이 되어도 환곡을 갚지 않았다. 또 군역 부담자의 반 이상이 이향(吏鄕)의 양호가 되어 군역을 모면한다고 지적되기도 하였다.

양호와 거의 비슷한 것으로 대호(代戶)가 있었다. 대호는 호수로 차출된 사람을 대신하여 호수직을 수행하는 것으로 양호와 같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양호는 세금을 납부해야 하는 토지를 가진 자만이 할 수 있었다. 즉, 양호를 하기 위해서는 경작지를 8결 단위로 구획하는 과정에서 호수가 되어야 하고, 호수는 납세자 중에서 선정하므로 납세 대상 토지를 갖지 않고서는 양호를 할 수 없었다. 반면 방결(防結)은 양호와 달리 자신이 세금을 내야 할 토지가 없더라도 경제력을 갖춘 이속(吏屬)이면 할 수 있었다.

대동법 실시 전에는 양호의 주체가 토호였는데 대동법 실시 후에는 토호 외에도 품관(品官)이 양호의 주체로 나타났다. 품관이 양호의 주체로 나타난 것은 종래 방납으로 영리를 취해 오다가 대동법 실시로 방납 활동이 중지되자 영리의 방법을 양호로 전환한 것이었다.

[변천]
양호의 폐단에 대해 1700년(숙종 26) 7월 호조 판서 이인엽(李寅燁)은 “이른바 양호란 읍내(邑內)에 사는 관속(官屬)들이 각 면(面)에 거주하는 백성들에게 전세·대동미·삼수미 등 토지에 부가되는 세금을 사적으로 취하고 관가(官家)에 납부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거두어들이지 못한 대동세·전세가 많은 것은 실로 이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관가에서는 토지 주인에게 독촉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백성 입장에서는 더러 세금을 이중으로 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환곡을 분급할 때에도 토호들은 각 면의 민호에 편승하여 받아먹지만, 관가에서 환곡을 돌려받을 때에는 이름만 보고 징수하는 까닭에 환곡을 받지 않은 민호에서 아무 이유도 없이 징수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유형원과 이익은 양호의 폐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우두머리로 3명을 뽑던 중국 위나라의 삼장제(三長制)를 소개하고 그 실시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1746년(영조 22)에 편찬된 『속대전』에는 “민결을 겁탈하여 역가(役價)를 강제로 징수하는 속칭 양호라 불리는 자들은 장물(臟物)의 경중을 헤아려 도형(徒刑)·유형(流刑)으로 그 죄를 다스린다.” 하는 조항 등 5개의 금제(禁制)가 설정되었다.

토호배들이 호수의 역을 수행하는 경우 그들은 이를 통하여 거대한 이익을 사적으로 취하였다. 그들은 결당 조(租) 50두의 국역(國役)보다 2배나 많은 양을 징수하였고, 이는 『조선왕조실록』에서 ‘백두(百斗)의 예(例)’라고 표현한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또 경우에 따라 그들은 수십 개의 8결, 즉 주비(注非)를 맡아 호수직을 수행하였다. 그들은 향촌에서 존재한 거대한 중간 수탈 권력이었다. 비록 토호배까지는 아니어도 일반 호수들도 약간의 모리를 행함은 매우 흔한 현상이었다. 『거관대요(居官大要)』 가운데 “호수가 하나의 변칠을 부리면 곧 양호가 된다.” 하면서 “양호란 민간의 높고 낮은 호수들이 하지 않는 자가 없다.” 한 것은 호수의 성격을 정확히 표현하는 말이었다.

이와 같이 호수의 민호에 대한 수탈과 가징(加徵)이 가능한 이유는 이들 호수와 민호와의 관계가 향촌의 질서 속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으며, 또한 그 역(役)의 수행이 향촌에서 관행적으로 허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경작지를 8결 단위로 묶던 작부제(作夫制)는 중앙의 조세 수취에 대응하는 향촌 고유의 대응 방식이었으며, 그 시행은 향촌의 계급 질서나 관행에 의거할 수밖에 없었다.

양호는 대동법 실시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았다. 양호의 폐단은 어떤 면에서 궁방전(宮房田)의 폐단과 유사하였다. 비록 사회적으로 궁방과 양호는 명백히 달랐지만, 양자 모두 특권과 관행이 인정되던 신분제 사회의 산물이었다. 궁방에게서 공식적으로 대동미·대동포 수취가 면제되었다면, 양호는 폐단이나 문제점의 형태로 지속되었다.

대동법은 각 군현의 전결 규모에 따라 공물가를 정하였다는 점에서, 현물 공납제에서 뚫지 못했던 각 군현의 외피를 깨뜨리는 데는 성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각 군현에 부과된 공물을 각 군현 내부에서도 전결 소유에 비례하게 수취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각 군현 내부까지 파악하거나 장악할 수는 없었다고 하겠다.

18세기 말 내지는 19세기 초엽부터 조세 수취 체제는 봉건적 조세의 최종적 형태인 도결(都結)로 변화해 갔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거관대요(居官大要)』
■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역사비평사, 2010.
■ 장동표, 『조선 후기 지방 재정 연구』, 국학자료원, 1999.
■ 김갑주, 「조선 후기의 양호(養戶)」(상), 『역사학보』 85, 1980.
■ 김갑주, 「조선 후기의 양호(養戶)」(하), 『역사학보』 86, 1980.
■ 이영훈, 「조선 후기 팔결작부제에 대한 연구」, 『한국사연구』 29, 1980.
■ 정선남, 「18·19세기 전결세의 수취 제도와 그 운영」, 『한국사론』 22, 1990.

■ [집필자] 박도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