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척도(尺度)가 존재하였는데, 그중에서 주척은 토지조사사업인 양전(量田)에 활용되었다. 조선은 농업에 기반한 경제구조를 가졌고, 조세 수취를 위하여 국가 차원에서 양전이 매우 중시되었다. 양전을 실시할 때 가장 중요한 내용 중 하나는 어떤 자로 양전을 실시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 때문에 주척은 조선시대에 몇 차례 절대적인 길이가 변하였고, 마지막에는 미터법으로 귀결되었다.
[내용]
주공(周公)은 상고시대에 손가락 길이를 기준으로 단위를 측정하는 방법인 지척(指尺)을 주나라의 관척(官尺)으로 제정하였다. 이것은 19.496㎝에 해당하였다. 그 뒤 이 관척을 주척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주척 8척을 1보(步)로 하였으나, 나중에는 6척 4촌(寸)을 1보로 하였다.
『주례』의 기준척이던 주척은 우리나라에서도 예제(禮制)의 기준척이 되었다. 조선초기의 도량형은 고려시대의 것을 계승하였다. 1444년(세종 26)에 제정된 공법에서 전품을 6등급으로 재편성할 때 종래의 수등이척(隨等異尺)의 지척(指尺)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등이척의 주척으로 양전을 실시하였다. 수등이척은 토지 등급에 따라 기준척을 달리한다는 뜻이었다. 이때 적용된 주척은 20.795㎝에 해당하였다. 1등 양전척(量田尺)의 1척은 주척 4.775척, 2등은 5.179척, 3등은 5.703척, 4등은 6.434척, 5등은 7.550척, 6등은 9.550척이었다.
[변천]
주척은 성종대 이미 그 길이가 늘어나 『경국대전』에서는 주척이 21.04㎝로 규정되었다. 『경국대전』 도량형 조목에 나오는 것은 대체로 세종대까지 정리된 결과였다.
세종대의 자로는 황종척(黃鍾尺)·주척(周尺)·영조척(營造尺)·조례기척(造禮器尺)·포백척(布帛尺) 등이 있었다. 황종척 1척은 주척 6촌 6리=6.6, 영조척 8촌 9푼 9리=8.99, 조례기척 8촌 2푼=8.23, 포백척 1척 3촌 4푼 8리=13.48이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삼척부(三陟府)의 포백척을 제외한 모든 표준척이 없어진 뒤 표준척이 문란해지자, 영조대 삼척부의 포백척을 기준으로 하여 세종대의 척도를 복원하려 하였으나 전국적인 통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표준척의 문란은 결국 1902년(광무 6)에 도량형제도를 개혁함으로써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이때 미터법을 도입하면서 표준척 1척을 10/33m로 하고, 이 척도를 원척(原尺)이라 하여 일본의 곡척(曲尺)을 표준척으로 제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