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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조선의 전세 부과 방식은 손실에 비례하여 세액을 차감해 주는 답험손실법이었다. 즉, 토지 1결당 수확량을 300두(斗)로 보고 그에 따른 세액은 30두로 상정한 다음, 수확량에 손실이 발생하면 그 만큼 세액을 감해 주는 것이었다. 이것이 답험법의 한 가지 방식인 수손급손법이었다. 그런데 답험손실법에서 조세의 부과 방식은 시기별로 차이가 있었다.
수손급손에 의한 답험손실법의 운영은 1405년(태종 5) 이후 정착되었다. 수손급손은 손실분 발생과 납부 세액을 정확하게 대응하도록 한 것이었다. 또한 풍흉을 판단하는 답험 방식도 기존의 민의 신고답험에서 모든 필지를 정부가 답험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수손급손에 의거한 답험법은 공법이 도입되면서 폐지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수손급손은 생산량과 세액이 정확히 비례한다는 점에서 가장 합리적인 조세 부과 방식이었다. 또한 조세를 부과하는 모든 토지를 답험 대상에 포함시켜 보다 공평한 과세가 가능해졌다. 한편으로 기존의 답험손실법과 달리 수손급손은 10~20% 수확에도 과세가 가능하게끔 하였는데, 자연재해 등으로 많은 손실이 발생하는 토지가 많았던 점을 감안하면 실제 국가 재정의 확보에도 큰 기여를 하였을 것이다.
[내용]
1391년(공양왕 3)에 전제(田制)개혁이 실시되었다. 이때 결정된 전세 수취 방식은 수확량에 비례하여 1/10을 거두는 것이었다. 단, 수확이 2분실 즉, 20% 이하인 경우, 다시 말해서 1결에 60두 이하일 경우에는 전세를 전액 감면하였다. 이 방식은 몇 년 뒤인 1393(태조 2)에 한 차례 바뀌었다. 수확이 8분실 이상, 즉 80% 이상일 경우에는 감면 없이 30두 전액을 납입하도록 하고, 종전대로 2분실 즉 20% 이하의 수확일 경우는 전액 면제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위의 두 방식은 손실 발생분과 조세 감면액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았다.
1405(태종 5)에 이르러 수손급손법이 도입되었다[『태종실록』 5년 9월 17일]. 즉, 종전과 달리 손실이 발생하면 그에 정확히 비례하도록 감면하게 한 것이다. 따라서 10% 수확에도 3두의 과세가 가능하였다. 조선의 농업기술이 발전하지 못하였고 자연재해에 대한 방비가 취약하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실제 10~20% 정도를 수확하는 토지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따라 기존의 감면 조치에 비해 수손급손법은 국가 재정 확보에 유리하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수손급손법이 도입되면서 풍흉(豊凶)을 판단하는 답험의 방식도 변하였다. 기존의 신고에 의한 답험에서 원칙상 모든 경작지를 관(官)이 직접 답험하는 방식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답험 방식은 정부의 높은 행정력을 기반으로 할 때 가능한 것이었다.
세종대 공법을 도입할 당시 답험의 단위를 확대하고자 했던 것도 수손급손 방식에 소요되는 행정력을 다소 완화시키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변천]
1444년(세종 26)에 공법의 도입이 결정되고, 이후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삼남(三南) 지역부터 점차 공법 수세가 시행되어 가면서 답험손실법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토지 생산력이 열악한 일부 지역에서는 15세기 후반까지 답험손실법에 의한 수세가 유지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강제훈, 『조선 초기 전세 제도 연구: 답험법에서 공법 세제로의 전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2.
■ 이재룡, 『조선 전기 경제 구조 연구』, 숭실대학교 출판부,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