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환취정은 1484년(성종 15) 9월 27일 창경궁 창건 당시 조성되었다. 성종은 정자의 이름을 ‘환취정’이라 직접 짓고 김종직(金宗直)에게 환취정 기문을 써서 올리라 명하였다[『성종실록』 15년 7월 5일]. ‘환취’는 빽빽한 나무숲과 산자락에 놓여 주변은 쪽빛 푸른 기운이 감돌고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정자를 둘러쌌다는 뜻이다.
[위치 및 용도]
통명전(通明殿) 북쪽 모퉁이에 놓여 있었다. 정조 때 정자의 동쪽으로 자경전(慈慶殿)을 건립하면서 자경전 의례를 위한 준비 장소로 짝을 이루어 사용되기도 하였다. 환취정은 「환취정기(環翠亭記)」에서 말한 것처럼 왕이 한가로이 휴식하고 후원의 풍경을 완상(玩賞)할 때 머무는 장소이다. 환취정은 종친과 더불어 잔치를 베푸는 곳으로도 쓰였지만 강학을 위한 장소, 병을 피해 거처를 옮기는 피병(避病)의 장소로도 쓰였다.
[변천 및 현황]
성종대에 창덕궁의 동쪽 수강궁(壽康宮) 터에 창경궁을 지었는데, 이는 대비를 위한 시어소(時御所)로 마련된 장소였다. 그 중 환취정은 창경궁의 후원 후미진 곳에 마련되어, 화재로 연달아 소실된 다른 전각과는 달리 조선왕조 말까지 건재했다. 1827년(순조 27) 효명세자(孝明世子)가 왕비를 위로하기 위해 주도한 진연에서 자경전과 함께 의례의 주요 장소로 쓰이면서 의궤 기록상에 모습을 남겼다. 1856년(철종 7) 왕이 대왕대비께 문안하고 환취정에서 신하들을 대면하였다는 기사 이후에는 환취정에 관한 다른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동궐도형(東闕圖形)」에서 자경전과 함께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자리에 일본식 건물인 장서각을 세우면서 헐려 나간 것으로 보인다.
[형태]
전돌을 깐 기단 위에 ‘ㄱ’자형 평면의 건물을 놓았다. 방과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고 기단 위에 놓인 계단을 올라가 실내로 들어간다. 팔작지붕을 올린 익공계 집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1724년(경종 4) 8월 25일 경종이 피병을 위해 환취정으로 이어한 지 20일 만에 승하하였다[『경종실록』 4년 8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