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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천구(天球)의 적도(赤道) 주변에 있는 28개의 이정표 별자리를 통틀어 이르는 말.
[개설]
이십팔수(二十八宿)는 지구의 적도를 하늘로 연장한 천구 적도의 주변에 위치한 28개의 밝은 별자리를 가리킨다. 이 28개의 별자리 이름이 온전히 기록된 최초의 사료는 기원전 3세기 중반 진시황이 등극하던 무렵에 편찬된 여불위(呂不韋)의 『여씨춘추(呂氏春秋)』 「유시람(有始覽)」이다. 이 내용이 동양 고대 천문서의 대표 격인 사마천의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에 수록되면서, 이후 오늘날까지도 동양의 표준 별자리로 전승되고 있다.
[내용 및 특징]
사마천은 『사기』「천관서」를 쓰면서, 오관(五官) 이십팔수 분류법을 설정하여 온 하늘의 별자리를 모두 수록하였다. 오관은 훗날 오궁(五宮)으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동양 천문학의 기본 좌표 체계인 천구의 적도를 기준으로 그 주변 별자리를 중앙과 동·서·남·북의 사방위로 포괄한 개념이다. 중앙의 중궁(中宮)은 동양 별자리의 중심인 북극성 주위의 별자리이고, 동궁(東宮)은 봄철 남쪽 하늘에 떠오르는 별자리이며, 서궁(西宮)은 가을철에 볼 수 있는 별자리들이다. 남궁(南宮)과 북궁(北宮)은 각각 겨울철과 여름철 별자리들이다. 이렇게 하여 이십팔수 별자리는 사방위에 해당하는 사궁(四宮)으로 분류되어 각 궁에 7개씩 배정되었다. 그런데 이때 사마천은 동궁은 창룡(蒼龍), 남궁은 주조(朱鳥), 서궁은 백호(白虎), 북궁은 현무(玄武)라 하여 각 궁의 별자리를 조합한 형태를 사신(四神)의 형상에 비유하였다. 그리하여 이십팔수는 창룡칠수(蒼龍七宿), 주조칠수(朱鳥七宿), 백호칠수(白虎七宿), 현무칠수(玄武七宿)로 분류되기도 하였다. 방위와 계절에 따라 분류된 이십팔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하늘에 있는 수많은 별자리 중에서 이처럼 특정 별자리를 골라 개념화한 것은 천구 상의 모든 별자리를 설명하기 위한 좌표 개념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천문학에서는 경도(經度)와 위도(緯度)를 기준으로 천구의 좌표를 설명하지만, 고대 중국에서는 북극점을 정점으로 삼고, 여기에 90도 축을 이루는 적도를 기본 좌표 체계로 인식하였다. 그런 다음 적도 360도를 돌아가면서 만나는 별자리 중에서, 밝아서 눈의 잘 띄거나 의미 있는 모양의 별자리를 택하여 경도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이다.
28개를 택한 것은 달의 운동 주기와 관련이 있다. 달은 적도와 황도를 넘나드는 백도(白道)를 따라 주천한다. 달이 천구를 한 번 주천하여 출발점으로 복귀하는 약 27.3일의 주기를 항성월(恒星月)이라고 한다. 이 항성월에 따라 달은 매일 하나의 별자리 숙소(宿所)에 머물렀다 이동하는데, 28일째에는 처음 출발한 별자리 집으로 되돌아온다. 이것이 28개의 숙소를 가리킨다고 하여 28‘숙(宿)’이라 이름하였고, 여기에 쓰인 ‘잠잘 숙(宿)’ 자가 결국 별자리를 뜻하므로 ‘별자리 수’로 의미가 파생되어 28수가 되었다. 또는 달이 잠자는 집이라는 뜻에서 ‘28사(舍)’라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27.3일 주기는 28일보다는 오히려 27일에 더 가깝다. 그 때문에 초기에는 27수를 사용하기도 하였고, 인도 천문학에 바탕을 둔 불교에서도 그 영향을 받아 27수를 선호하였다. 한편 삭망월(朔望月)은 지구 관찰자 시점에서 달의 차고 이지러지는 위상(位相)이 처음 관찰 시점으로 복귀하는 약 29.5일의 주기를 가리키는데, 일하분(日下分)인 0.5일을 반올림하여 큰달은 30일, 작은달은 29일로 하는 음력 달의 크기와 관련이 있다.
이처럼 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28이란 숫자의 원리를 얻었으나, 28수의 구체적인 별자리는 천구의 적도면(赤道面)을 따라 정하였다. 그래서 ‘적도 28수’라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지구의 세차운동으로 인해 매년 조금씩 춘분점이 이동함에 따라 오늘날에는 28수가 절반은 적도에 걸쳐 있으나 나머지 절반은 황도면(黃道面)에 걸치는 상태가 되었다. 때문에 이를 오해하여 ‘황도 28수’라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서양과 달리 동양 천문학의 중심은 태양이 아니라 북극성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적절하지 않다.
사마천에 의해 체계화된 이십팔수는 이후 동양 천문학의 표준 별자리로 기능하였다. 사마천 이후 최고의 역사가로 꼽히는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실린 천문의 정의에도 그 같은 관점이 잘 나타나 있다. 그에 따르면 천문이란, ‘이십팔수의 차서(次序)를 정하고 일월오성(日月五星)의 역산(曆算)을 추보(推步)하여 길흉화복의 계통을 세움으로써 성왕(聖王)이 정치에 참조’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동양 천문학이 지니는 재이론(災異論)적 특징 곧, 천문학이 그 자체의 목적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정치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십팔수와 관련된 기록들이 많이 있는데, 여러 상황에서 다양하게 이십팔수를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이십팔수를 성변(星變) 관측의 기준으로 삼았다. 1411년(태종 11)에 달이 금성을 범하자 왕이 일관(日官)을 불러, “『문헌통고(文獻通考)』를 보니, 이십팔수가 하늘에 포열(布列)해 있고 열국(列國)이 각기 열수(列宿)의 분도(分度) 안에 있게 되어, 만약 성변이 있게 되면 그 도수(度數) 안에 있는 나라가 근심한다 하였다. (중략) 나는 우리나라가 미성(尾星)과 기성(箕星)의 분도 안에 있고 또 달이 목성을 범하는 것이 매우 잦으니, 무슨 빌 필요가 있겠는가 생각하여 기양(祈禳)하지 말라고 명하였다.”고 하였다[『태종실록』 11년 1월 5일]. 중국에서는 하늘의 이십팔수에 별러 천하를 나누고, 이를 분야(分野)라고 하였다. 그런데 성변이 일어나는 별자리가 있으면, 그 별자리의 분야에 해당하는 나라에 재난이 닥친다고 생각하여 재앙이 물러가기를 빌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당시 우리나라는 동방칠수 중 미수(尾宿)와 기수(箕宿)의 분야에 해당하였음도 확인할 수 있다.
둘째, 파루(罷漏)의 종 치는 횟수를 이십팔수에 따르도록 하였다. 1414년(태종 14)에는 5경(更) 초점(初點)에 종을 치던 것을 5경 3점에 치도록 개정하였는데, 이때 이응(李膺)이 “궐문(闕門)에서 새벽과 저녁에 종(鍾)과 북[鼓]을 일시에 치는 것은 중국과 같지 않으니, 마땅히 북을 친 뒤에 종을 쳐야 합니다. 종을 치는 횟수는 대개 64괘에 따르는 경우가 많으니, 청컨대 이십팔수의 수(數)에 따르소서.”라고 하였다[『태종실록』 14년 6월 20일]. 그 결과 종 치는 횟수가 28회로 정해졌다.
셋째, 의장이나 군진의 사열 행진 때 이십팔수기(旗)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1424년(세종 6) 병조에서, “큰 사열을 할 때 좌우상(左右廂)과 중위(中衛)와 중소(中所)에 사용되는 이십팔수기 두 개와 12신장기(神將旗) 두 개, 큰 독기[大纛] 두 개, 중간 크기의 독기[中纛] 12개 및 작은 독기[小纛] 8개를 군기감(軍器監)에서 만들어 운반케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세종실록』 6년 9월 10일].
넷째, 천문 역법을 개정하기 위해 정밀하게 천문을 관측할 때 이십팔수의 도수(度數)를 측정하였다. 1445년(세종 27) 동부승지 이순지(李純之)는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의 발문에서, “제왕의 정치는 역법과 천문으로 때를 맞추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우리 동국의 일관(日官)들이 그 방법에 소홀한 지가 오래인지라, 선덕(宣德) 계축년(1433) 가을에 우리 전하께서 거룩하신 생각으로 모든 의상(儀象)과 구루(晷漏)의 기계며, 천문과 역법의 책을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모두 극히 정묘하고 치밀하셨다. (중략) 또 고금의 천문도(天文圖)를 바탕으로 같고 다름을 참고하고 측정하여 바른 것을 취하게 하고, 그 이십팔수의 도분(度分)과 12차(次)의 수도(宿度)를 『수시력(授時曆)』에 따라 수개(修改)하여 석본(石本)으로 간행케 하였다.”라고 말하였다[『세종실록』 27년 3월 30일].
다섯째, 천문을 관측하는 기구인 의기(儀器)에도 이십팔수 별자리가 기준으로 사용되었다. 1490년(성종 21)에 왕이 휴대용 관측 기기인 소간의(小簡儀)의 점후상(占候狀)과 그 관측 원리를 묻자 김응기(金應箕) 등이, “시간을 측정할 때 사용하는 사유환(四游環)에는 두 개의 둥근 테가 장치되어 있습니다. 그중 안쪽의 백각환(百刻環)에는 12시(時)와 100각(刻)을 새겨, 낮에는 햇빛으로 시간을 알고 밤에는 중성(中星)으로 시간을 알도록 하였습니다. 또 그 바깥쪽의 적도환(赤道環)에는 이십팔수와 천체(天體) 둘레의 도수를 새겼고, 동서로 움직이게 하여 그것으로 칠정(七政)과 중외관(中外官)의 입수도(入宿度)를 관측하게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성종실록』 21년 12월 5일].
여섯째,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조직하는 계(契)의 명칭에 쓰이기도 하였다. 1492년(성종 23)의 기록을 살펴보면, “황필(黃㻶)이 재명(才名)이 있었는데, 성균관 안에서 문예를 시험할 때 누차 수석에 올랐다. 일찍이 동배(同輩) 중에서 명망 있는 자 28인과 더불어 계를 만들었는데, 여기에 참여하지 못한 자가 자못 그를 원망하여 이십팔수계(二十八宿契)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중략) 유사(儒士)들이 서로 시기하고 모함함이 이와 같았다.”[『성종실록』 23년 1월 19일]는 내용이 있다. 이십팔수가 사회나 일상에서 널리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곱째, 뛰어난 인물을 비유하는 데도 쓰였다. 1760년(영조 36), 왕이 경현당에 나아가 유신(儒臣)들에게 어필로 ‘서궐임서남두학사(西闕臨署南斗學士)’의 여덟 글자를 내려주면서, “예전에는 이십팔수를 이십팔장(二十八將)에 비하였는데, 지금의 유신은 여섯 사람이기 때문에 남두(南斗) 여섯 별에 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영조실록』 36년 10월 8일].
여덟째, 제천 의례 때, 천문을 대표하는 신(神)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1897년(광무 1)에 장례원(掌禮院) 경(卿) 김규홍(金奎弘)이 올린 환구단(圜丘壇) 의문(儀文)을 살펴보면, “호천상제(昊天上帝)와 황지기(皇地祇)의 위판(位版)과 대명(大明)·야명(夜明), 오성(五星), 이십팔수, 주천성신(周天星辰), 풍운뇌우(風雲雷雨), 오악(五嶽)·오진(五鎭), 사해(四海)·사독(四瀆) 신들의 위패(位牌) 및 변두(籩豆)의 수와 의식 규정의 정도는 하(夏)·은(殷)·주(周) 삼대(三代) 이후로 제도가 각각 달랐지만, 오늘날처럼 예가 미비한 적은 없었습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고종실록』 34년 9월 25일]. 이십팔수를 신격화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처럼 이십팔수는 정밀한 천문 관측의 기준이 된 것은 물론이고, 분야설(分野說)에 따른 성변 재이론을 통해 나라의 길흉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였으며, 천문을 대표하는 신으로 추앙되기도 하였다. 또한 파루의 종 치는 횟수, 의장에 사용하는 깃발, 뛰어난 인물에 대한 비유 등으로 활용되기도 하는 등, 사회 전반의 문화와 의식에 널리 사용되는 중요한 주제어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