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봉보부인(奉保夫人)

서지사항
항목명봉보부인(奉保夫人)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외명부(外命婦)
관련어아보(阿保), 봉작(封爵)
분야정치
유형직역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외명부(外命婦)의 하나로 왕의 유모(乳母)에게 봉작했던 종1품의 관직.

[개설]
봉보부인(奉保夫人)은 조선시대 외명부에 소속된 여성으로 왕의 유모를 일컫는다. 봉보부인은 궁중에서 원자나 대군만 키운 것이 아니라, 궁 밖에서 대군의 아들인 군(君)을 키웠다가 그 군이 후에 왕이 되어 봉보부인에 책봉된 경우도 있었다. 봉보부인은 다른 대군이나 양반가의 유모에 비해 종1품에 봉해지는 등 월등히 높은 지위와 대우를 받았다.

봉보부인의 기원은 중국 한(漢)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 송(宋)나라 때는 진종(眞宗)의 유모 유씨(劉氏)를 진국연수보성부인(秦國延壽保聖夫人)에 봉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문종이 형 덕종과 자신을 키워준 이모, 즉 태후(太后)인 어머니의 동생에게 노고를 갚기 위해 존호를 올리고 그에 따른 땅을 내려준[奉崇爵邑] 일이 있다.

조선 건국 이후 세종은 중국 제도를 참작해 길러준[阿保] 공을 중히 여겨 유모 이씨를 봉보부인이라 칭하고 종2품에 봉하여 거기에 맞는 녹봉을 주었다. 예종은 봉보부인의 의전(衣纏)과 선반(宣飯)을 정1품 빈 및 종1품 귀인과 같은 예우로 대접했고, 성종은 봉보부인이 죽은 뒤 3일 동안 조회를 열지 않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제도로서 자리를 잡아 『경국대전』 「이전(吏典)」 ‘외명부’에 유모는 종1품으로 정해졌다. 본래 외명부는 남편의 관직에 따라 품계를 주는 것이지만, 봉보부인은 남편의 관직과 관계없이 봉작되었다.

[담당 직무]
유모는 실질적으로 갓 태어난 아기를 키우는 사람이기 때문에 왕실에서는 유모를 선발할 때 각별히 신경을 썼다. 무엇보다 건강이 중요하였지만 마음씨도 고려하였다. 어린 아기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젖이 풍부하며 성품과 기질이 온순하고 혈기가 충만한 사람을 선발하였다. 갓난아이의 성품과 기질이 유모를 닮기 때문이었다.

봉보부인의 출신 신분은 대부분 천민이었다. 왕실에서는 유모를 양반의 처나 첩으로 삼고 싶어 했으나 이는 어려웠기 때문에 남녀유별을 따지지 않는 천민이 주로 봉보부인이 되었다. 종친들은 자신이나 주변 친·인척의 여종 중 젖먹이를 둔 여성을, 원자나 대군의 경우는 내수사(內需司)의 여종 또는 가까운 종실의 여종 가운데에서 산모를 유모로 선택했다. 유모의 가장 큰 역할은 원자에게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며 옷을 갈아입히고 진자리 마른자리를 가려 눕히는 것이다. 단순히 젖만 먹이는 것이 아니라 신생아에서부터 3년 정도 그 성장 과정을 도왔으며, 이후에도 유모와 시종 역할을 하였다. 왕과 유모는 특별한 유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시대 왕들은 자신의 유아 시절 젖을 먹여주고 보살펴주었던 봉보부인에 대해 각별하게 대우하였다. 왕은 봉보부인에게 물질뿐만 아니라 신분까지도 높여주었으며, 모든 행사에서도 예우하였다. 봉보부인을 종1품의 관직에 책봉하여 녹봉을 주었으며, 그 외에도 수시로 많은 물질을 제공하였다. 즉 음력 정월과 4월, 7월, 10월에 묵은 물품을 바꾸어주거나 일부 명절날 또는 장이나 김치를 담글 때에 연례적으로 추가 물품을 지급하였다. 이 밖에도 기름종이나 두부장에서 소요되는 물품을 추가 지급하였고, 사망 시에는 상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물질적 대우는 물론 신분적으로도 천민의 신분을 면[免賤]해주었다. 유모의 남편과 자식, 친·인척까지도 천민을 면하게 해주었으며 남편과 자식에게는 높은 관직을 주기도 했다. 특히 어린 나이에 즉위한 성종과 불우한 성장 과정을 거친 연산군은 자신의 유모에게 특별 대우를 해주어 대신과 대간에게 큰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변천]
봉보부인은 육아의 공을 인정받아 궁궐을 드나들며 왕과 왕비 그리고 왕실의 측근들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 왕들은 즉위 직후 자신의 유모가 살아있을 경우 그를 봉보부인으로 책봉하였다. 조선시대 여성이 봉작을 받는 경우는 왕비의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남편의 지위에 따랐으나 봉보부인은 오직 자신의 공로에 의해 봉작을 받았다. 봉보부인은 궁녀나 의녀들보다 훨씬 품계가 높았다.

봉보부인은 왕과 왕비 등 왕실과 가까이 지냈던 인물인 만큼 그 주변에는 출세를 하려는 자들이 많았고 이로 인해 여알(女謁)이 자행되기도 했다. 따라서 봉보부인이 행실이 올바르지 못하고 여알을 행한다는 비난이 일기도 했지만 왕들은 오히려 봉보부인을 두둔하였다. 천민 출신이었던 봉보부인은 조선시대 여성으로서는 가장 출세한 여성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박미선, 「18·19세기 왕실 유모의 범위와 위상」, 『사총』 73, 2011, 5.
■ 한희숙, 「조선 전기 봉보부인의 역할과 지위」, 『조선시대사학보』 43, 2007.

■ [집필자] 한희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