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1416년(태종 16)에 강화된 육조의 기능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새로이 종2품 차관 격으로 설치되면서 정착되었고, 1434년(세종 16)에는 2년 전에 좌·우로 분화되었던 참판(參判)을 통합하면서 정립되어 조선시대 말까지 운영되었다. 참판은 하위 관직인 참의(參議)와 더불어 장관인 판서(判書)를 보좌하고 낭관인 정랑과 좌랑을 지휘하면서 조(曹)의 운영에 참여하였다. 또 육조가 의정부 및 비변사의 지휘를 받으면서 혹은 독자적으로 국정을 나누어 맡아 업무를 수행하며 국정 운영에 큰 영향을 미쳤으므로, 육조의 차관인 참판 역시 국정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더욱이 조정의 중대사는 참판 이상이 참여한 재상 회의에서 논의·결정하였으므로 그 영향력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참판은 종2품 관원 가운데 재주와 식견이 뛰어난 명망 있는 인물이 제수되었는데, 정2품이나 판서로 승직하기 위해 역임하는 요직으로 인식되면서 같은 품계의 관직 중에서 가장 우월한 지위를 누렸다.
[기능과 관직 지위]
참판은 참의와 더불어 장관인 판서를 보좌하며 소속 조의 업무를 지휘하였고, 판서·참의와 함께 또는 판서·참의·정랑·좌랑과 함께 조와 관련된 정사를 논의하였다. 정랑·좌랑이 처결한 해당 조와 속사(屬司)의 정무를 검토·결재하고 낭청이 수행한 일에 책임을 졌으며, 판서·참의와 더불어 정랑·좌랑 및 속아문 관원에 대한 인사 평정[褒貶]에 참여하였다. 또한 판서가 유고할 경우에는 판서를 대신하여 서사(署事)에 참여하면서 조의 운영을 주관하였고, 조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는 판서에 못지않은 발언권을 행사하였다. 각 조의 사무는, “참의가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못하고, 판서·참판과 함께 논의한 뒤에 결정하였다.”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성종실록』 25년 1월 11일], 3명의 당상관이 합의를 통해 정책을 결정하고 시행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상참(常參)에 참여하여 소속 조의 업무를 보고하고 왕의 지시를 받았으며, 판서·참의와 더불어 윤번으로 시사(視事)에도 참여하였다. 또 국정 현안이나 중대사를 논의할 때, 의정을 비롯하여 육조의 참판 이상 관원들과 함께 참가하여 의견을 개진하였다. 한편 경연(經筵) 특진관(特進官)·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국장도감(國葬都監) 제조(提調) 등을 겸대하면서 해당 정사를 지휘하였으며, 정조부사(正朝副使)·순찰사(巡察使) 등으로 파견되어 그와 관련된 일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참판은 정책 기관이자 국정을 나누어 맡은 육조의 차관으로서 국정 운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에 가문이 훌륭하고 재주와 식견을 갖추었으며 조상과 본인에게 허물이 없는 인물을 임명하였는데, 주로 승지(承旨)·참의 등이 승진하면서 또는 부윤(府尹)·관찰사(觀察使) 등이 체직되면서 제수되었다. 이후 정2품이나 판서로 승진하면서 체직되었고, 무난히 정2품 이상의 관직에까지 승진하였다. 그에 따라 참판은 판서에 제수되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중요한 관직으로 인식되면서, 종2품직 가운데서 가장 우월한 지위를 누렸다.
[변천]
1405년(태종 5)에 육조가 정책 및 서정(庶政) 기관으로 정착되고 1414년(태종 14)에는 국정이 육조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가 시행됨에 따라, 기능이 강화된 육조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1416년에 차관이던 정3품 당상의 좌·우참의 각 1명 중 1명을 감원하고 새로이 종2품 참판 각 1명을 두어 차관으로 삼으면서 성립되었다. 이어 1432년(세종 14) 12월에 참판·참의의 출사(出使) 및 신병(身病)으로 인한 육조의 업무 적체, 연로하거나 공이 있는 무관의 활용 등을 이유로 참의와 함께 각 1명이 증원되면서 좌·우참판으로 분리·개칭되었다. 그 뒤 1434년 10월에 활용할 무관이 부족해지자 다시 참의와 함께 각 1명이 감원되면서 참판 각 1명으로 통합되었다. 이 관제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법제화되어 조선시대 말까지 계승되다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에 수반된 근대식 관제 개혁에 따라 육조가 내무(內務)·외무(外務)·탁지(度支)·군무(軍務)·법무(法務)·학무(學務)·공무(工務)·농상(農商)의 8아문으로 개편될 때 칙임관(勅任官)협판(協辦)으로 개칭·계승되면서 소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