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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참의(參議)는 1405년(태종 5)에 육조가 정책 및 서정(庶政) 기관으로 정착될 때, 장관인 판서(判書)에 이어 차관 격으로 둔 좌·우참의에서 비롯되었다. 1416년(태종 16)에 참판(參判)이 새로이 차관직으로 설치됨에 따라 참의로 통합되면서 정착되었고, 1434년(세종 16)에는 2년 전에 다시 좌·우로 분화되었던 참의가 통합되면서 정립되어 조선시대 말까지 운영되었다. 참의는 상위 관직인 참판과 더불어 판서를 보좌하고 낭관인 정랑과 좌랑을 지휘하면서 조의 운영에 참여하였다. 또 육조가 의정부 및 비변사의 지휘를 받으면서 또는 독자적으로 정무를 수행하면서 국정 운영에 큰 영향을 끼쳤으므로, 육조의 차관인 참의 역시 국정 전반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참의는 정3품 당상관 중에서 재주와 식견을 갖춘 명망 있는 인물이 제수되어 종2품이나 참판으로 승직하는 요직이 되면서, 승정원(承政院)승지(承旨)·홍문관(弘文館)부제학(副提學)·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과 함께 정3품 당상관 가운데 가장 우월한 지위를 누렸다.
[기능과 관직 지위]
참의는 장관인 판서와 차관인 참판을 도와 해당 조의 업무를 지휘하였고, 판서·참판과 함께 또는 판서·참판·정랑·좌랑과 함께 조와 관련된 정사를 논의하였다. 또한 정랑·좌랑이 작성한 그 조와 속사(屬司) 정사를 검토·결재하고 낭청이 수행한 일에 책임을 졌으며, 판서·참판과 더불어 정랑·좌랑 및 속아문(屬衙門) 관원에 대한 인사 평정[褒貶]에도 참여하였다. 이때 참의는 각 조의 차차석 관원이기는 하지만, 각 조의 중요 사무는 3명의 당상관이 합의하여 시행하도록 관례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차관인 참판과 함께 판서를 보좌하는 좌이관(佐貳官)이 아니라 당상관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상당한 발언권을 행사하였다. 또 참의는 상참(常參)에 참여하여 그 조의 정사를 보고하고 왕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다. 판서·참판과 함께 윤번으로 시사(視事)에도 참여하였으며, 판서와 참판이 유고할 경우 해당 조의 대표로서 참가하기도 하였다. 참의는 때때로 그 조의 직무와 관련된 일이나 국정 현안 등을 논의할 때, 의정을 비롯한 육조의 참판 이상 관원들과 함께 참가하여 의견을 개진하였다.
참의는 가문이 훌륭하고 재식(才識)을 두루 갖추었으며 조상과 본인에게 허물이 없는 승지 등 정3품 당상관이 체직되면서 제수되었다. 근무 후에는 대개 육조의 참판 등 종2품 관직에 승직되면서 체직되었고, 뒷날 무난히 정2품 이상의 관직까지 승진하였다. 그에 따라 참의는 청요직으로 인식되었고, 승정원 승지·사간원 대사간·홍문관 부제학과 함께 정3품 당상관을 대표하는 관직이 되었다.
[변천]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 7월에 관제를 정할 때, 고려말의 제도를 계승하여 이조·병조·호조·형조·예조·공조 등에 정4품 의랑(議郞) 2명씩을 둔 데서 비롯되었다. 1405년 1월에 태종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국정 운영의 중심을 의정부에서 육조로 전환함에 따라 육조의 장관이던 정3품 전서(典書)와 더불어 의랑이 혁파되고, 동시에 장관으로 정2품 판서 각 1명과 정3품 당상의 좌·우참의 각 1명을 새로 설치하면서 정착되었다. 이어 1416년 6월에는 2년 전 육조가 중심이 된 국정 운영 방식인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의 실시와 관련된 육조기능의 강화와 관련되어 새로이 차관으로 종2품 참판 각 1명을 둠에 따라 좌·우참의가 참의로 통합되면서 1명이 감원되었다. 다시 1432년(세종 14) 12월에 참판·참의의 출장 및 신병(身病)으로 인한 육조의 업무 지연, 연로하거나 공이 있는 무관의 활용 등을 이유로 참판과 함께 각 1명이 증원되면서 좌·우참의로 분리되었다. 그 뒤 1434년 10월에는 활용할 무관이 부족해지자 참판과 함께 각 1명이 다시 감원되어 참의 각 1명으로 통합·정립되었다. 이후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법제화되어 조선시대 말까지 계승되다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에 수반된 근대식 관제 개혁에 따라 육조가 개편된 8아문의 주임관(奏任官) 참의로 계승되었다. 1년 뒤 8아문이 개정된 내부(內部)·외부(外部)·탁지부(度支部)·군부(軍部)·법부(法部)·학부(學部)·농상공부(農商工部) 등 7부(部)의 주임관 국장(局長)으로 개칭되면서 소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