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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돈녕부·상서원·봉상시·군자감 등 여러 관서에 속하여 실무를 담당한 종7품직.
[개설]
직장(直長)은 조선의 개국과 함께 여러 관서에 설치되어 조선시대 말까지 운영되었다. 조선전기에는 대부분의 육조속아문(六曹屬衙門)에 설치되어 해당 아문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육조속아문에 설치된 관직은 많이 삭감된 반면, 새로이 선왕·선후의 능실 관리 책임자를 종9품 참봉에서 종5품 령(令)과 종7품 직장으로 보임함에 따라 정무에 종사하는 직장과 능을 관리하는 직장으로 분화되면서 운영되었다.
[담당 직무]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운영된 직장은 그 품계는 종7품으로 고정되었지만, 소속된 관서의 등급에 따라 그 직무에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정3품~종5품 아문에 소속된 경우에는 하위 관직인 봉사·부봉사·참봉과 함께 실무에 종사하였고, 종6품 아문의 직장은 장관인 주부와 더불어 봉사 이하를 지휘하면서 관서의 정무를 주관하였다. 또 각종 능에 속한 직장은 참봉을 지휘하면서 능실 관리를 총관하였다. 한편 돈녕부의 직장은 외척에게 주어진 예우직이었으므로 맡아본 사무가 없었다.
[변천]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 7월에 관제를 제정할 때, 고려말의 제도를 계승하여 상서사(尙瑞司)·전중시(殿中寺) 등 5시, 선공감(繕工監) 등 4감, 사선서(司膳署) 등 2서, 의영고(義盈庫) 등 3고에 정7품·종7품·종9품 직장 각 2명과 수창궁(壽昌宮) 제거사(提擧司)에 정8품 직장 4명을 두면서 비롯되었다. 이후 1466년(세조 12)까지 직제 정비 및 경비 절감 등을 이유로 관직 수가 크게 감소하였고, 육조속아문의 관직은 직명(職名)이 같으면 직질(職秩)을 통일한다는 방침에 따라 돈녕부와 상서원 등 30개 관서에 1~3명이 설치되면서 정착되었다. 이어 1484년(성종 15)까지 사옹방이 승격된 사옹원에 2명이 설치되면서 돈녕부와 상서원을 비롯한 31개 관서에 1~3명 등 총 40명으로 조정되어 그대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법제화되었다.
이후 『대전회통(大典會通)』이 간행된 1865년(고종 2)까지, 관서 기능의 성쇠에 따른 관서의 혁파·강등과 관직의 증감, 선왕·선후의 능·전 관리 등과 관련되어 여러 차례 변천을 겪었다. 사도시·사섬시·군자감·제용감·선공감·장악원·풍저창·전연사·사온서·장흥고의 직장은 모두 혁거되었고, 사직서(社稷署)와 경모궁(景慕宮)에는 1명이 설치되었다가 혁파되었다. 또한 돈녕부·내의원·상의원·사역원의 직장은 1~2명이 감원되어 1명만 존속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사포서(司圃署)·종친부(宗親府)·광흥창(廣興倉)과 덕릉(德陵)·지릉(智陵)·헌릉(獻陵)·선릉(宣陵)·순릉(順陵)·정릉(靖陵)·희릉(禧陵)·태릉(泰陵)·경릉(景陵)에는 각 1명이 설치되었다. 그에 따라 돈녕부를 비롯한 21개 관서와 덕릉을 비롯한 9개의 능에 각 1~2명 등 총 33명으로 조정되었다. 그 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의 과정에서 관제를 근대적으로 개혁할 때, 정3품 정(正) 이하의 여러 관직과 함께 주사(主事)로 통합되면서 소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