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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사포서에서는 왕실 소유의 밭[園圃]을 관리하고 채소 재배 등을 관장하였다. 1466년(세조 12) 침장고(沈藏庫)이던 것을 사포서로 고쳤다. 처음은 정6품의 아문이었으나 뒤에 실제 주재관인 별제의 품계에 따라 종6품의 아문이 되었다. 1409년(태종 9) 공조(工曹)에 소속되었다가 『경국대전』에는 호조(戶曹)의 속아문으로 변하였다. 1882년(고종 19) 폐지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궁궐에서 사용하는 채소와 왕실의 제사·연행에 필요한 채소를 공급하였다. 태조대 기록에 의하면, 사포서가 토지와 밭 가는 소[耕牛]를 소유하면서 각색 채소를 재배하고, 소를 키우는 일을 담당하였다.
이전에는 침장고라 불렀는데, 1414년 침장고에서 하는 일이 너무 많다고 하여 침장고를 혁파하고 대신 그 일은 다방(茶房), 전사시(典祀寺), 예빈시(禮賓寺) 등에서 나눠 하도록 하였다. 이때 관리들도 해당 관서로 옮겨 갔다. 그러나 2년 후 다시 침장고를 설치하였고 1417년 다시 혁파하였다. 침장고에서 제향과 각전(各殿)에 바치는 채소를 모두 담당하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침장고에서는 채소 물량을 다 대지 못해서 채소량이 매년 부족했고 부족한 부분은 쌀과 콩으로 바꾸거나 외방에서 더 거두게 하였다. 이에 다시 궁궐의 채소 공급은 전사시 등에서 맡게 하고, 침장고에 속해 있던 노비와 수레[車]·소·밭[菜田]도 나누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다시 침장고의 관서명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다시 설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466년 침장고를 사포서로 고쳤고 관원으로는 사포(司圃) 1명을 더 두었다. 관서는 한성부 중부 수진방에 위치하였다.
[조직 및 역할]
『경국대전』에는 사포서에 제조가 1명이고 별제 이하는 7명이라 하였다. 그 구성은 정6품 사포 1명과 정6품~종6품의 별제, 정8품~종8품의 별검으로 이루어졌다. 이속(吏屬)으로는 『육전조례』에 따르면 서원(書員) 6명, 고직(庫直) 1명, 사령 6명이 있었다.
사포서는 궁궐에서 사용하는 채소와 왕실의 제사·연행에 필요한 채소를 공급하였다. 사포서에서는 생강, 참외 등 여러 진상품을 진상하였는데 직접 재배하여 진상하기도 하였다. 노비도 120여 명 정도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종 이후에는 자체 재배보다는 하급 관리나 상인을 통해 구입하여 진상하는 방납(防納)을 많이 이용하였다.
연산군 때는 겨울에 채소를 기르기 위하여 장원서(掌苑署)와 함께 흙집을 만들기도 하였다. 즉 장원서·사포서로 하여금 흙집을 쌓고 겨우내 시금치[辛甘菜] 등 여러 가지 채소를 기르게 한 것이다. 이러한 시설은 세종 때 의관 전순의가 지은 『산가요록』이라는 농서에 나오는 것이다. 1552년(명종 7) 검토관 왕희걸은 겨울철에 꽃을 기르는 것은 흙집을 짓고 땔나무를 때야 해서 백성들이 많이 시달리므로 폐지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겨울철에 사포서에서 채소를 기르는 일은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연산군대에는 또한 사포서의 채전에 채소 대신에 콩이나 보리를 심어 진상할 무가 부족하였다. 그래서 부족한 무를 각 관서에서 납부하게 하거나, 경기 등의 지역에서 납부하게 하였다. 그 과정에서 퇴짜를 놓는 것이 많아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사포서의 종이 방납을 하겠다고 나설 정도였던 것이다. 그 외에도 많은 채소류를 바치다 보니 그 과정에서 관리 소홀이나 시노(寺奴)들의 횡포가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단순히 사포서 등에서 요구하는 물품을 납부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쌀과 포(布)로 대신 납부하게 하면서 관서와 백성을 연결해 주던 사주인(私主人)들이 이익을 챙겨 더욱 문제가 되었다. 사주인이 요구하는 값은 실제 가격의 두 배 이상이었다. 국가에 필요한 것은 사사로이 사들여 보충하였다. 그리고 흉년 등으로 외공(外貢)을 감하였는데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거두기도 하였다.
[변천]
조선중기 이후 제조 1명, 사포 1명, 별제 2명, 별검 2명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뒤에 사포와 별검은 없애고 별제도 1명을 감하였다. 그러면서 원래 정6품 아문이었으나, 이후 종6품 아문으로 변하였다.
1506년(연산군 12) 사포를 혁파하였다가 중종반정 이후 회복하였다. 연산군 때에는 금표(禁票)를 정하면서 각종 관서들이 금표 안에 들었다고 하여 옮겨졌는데 사포서는 중학(中學)으로 옮기게 하였다. 그런데 사포서가 옮긴 곳인 중학은 교육 기관이었다. 이에 중종반정 이후 중학으로 옮기는 데 찬성한 관원을 징계하였다.
1704년(숙종 30) 직장 1명을 신설하고, 이듬해 봉사 1명을 또다시 신설하였다. 그 뒤 영조 때 봉사를 없애고, 별제 1명을 더 두어 정원을 3명으로 늘렸다. 1882년 사포서를 혁파하고 바치는 공물은 사옹원에서 담당하게 하였다. 제조는 감하였고 낭관들은 모두 호조에 소속시켰으며 낭관의 명칭은 원외랑이라고 부르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