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유록관(有祿官)이라고도 한다. 이에 비하여 녹을 받지 못하는 관직을 ‘무록관(無祿官)’이라 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 관직 체계는 직무의 유무에 따라 실직(實職)과 산직(散職) 또는 허직(虛職)으로 구분되며, 실직은 다시 녹관(祿官)과 무록관으로 구분되었다. 이 가운데 녹관은 정직(正職)과 체아직(遞兒職)으로 구분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 건국 직후에 모든 관원은 녹관이었으나, 태종대를 거친 뒤 경관직의 제거(提擧)·제검(提檢)·별좌(別坐)·별제(別提)·별검(別檢) 등과 외관직 일부 관직이 무록관으로 정착되었다. 이후 관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양반의 관직 진출 욕구는 높아졌지만 국가 경비를 줄여야 했기 때문에 여러 차례 관제 개정이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녹관에서 정직은 축소되고 체아직은 크게 증가되었다. 그 결과 『경국대전』에는 모두 5,142자리의 녹관이 마련되었는데, 경관직이 4,652자리였고 외관직이 488자리였다. 경관직 중 3,110자리는 체아직이었다.
녹관 가운데 정직은 품계에 따라 과전을 지급받았다. 즉 정1품은 과전 110결을 지급받았고 9품은 10결을 지급받았다. 또한 품계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녹봉을 받았는데 정1품이 1년에 중미(中米) 14석, 조미(糙米) 40석, 전미(田米) 2석, 황두 23석, 소맥 10석, 주(紬) 6필, 정포 15필, 저화 10장을 받았다. 반면, 9품의 관원은 조미 8석, 전미 1석, 황두 2석, 소맥 1석, 정포 1필, 저화 1장을 받았다. 체아직이 받는 녹봉은 정직과는 달리 체아록(遞兒祿)으로 규정되었다. 체아록은 도목(都目)과 번차(番次) 규정에 따라 교체되면서 출근하여 근무하는 기간에 한정되어 지급되었다.
[변천]
연산군대인 1497년(연산군 3)에는 참새를 잡은 사람을 9품 녹관에 제수하도록 하고[『연산군일기』 3년 4월 5일], 궁녀 장녹수의 형부인 김효손(金孝孫)을 서반 녹관에 제수하는[『연산군일기』 9년 1월 4일] 등 녹관 운영이 파행적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대개는 중종반정 이후 원래대로 돌아간 듯하다.
이후에도 왕의 특별 명령으로 충신의 봉사손(奉祀孫)이나 의관(醫官) 혹은 산원(算員)들이 녹관에 제수된 예가 여러 차례 확인된다. 또한 정조대에 규장각이 설치되면서 사권(司卷)·영첨(領籤)·검서관(檢書官)과 같은 녹관이 소속되었고, 또한 장용영(壯勇營)의 별장(別將)도 녹관으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