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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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사(知事)

서지사항
항목명지사(知事)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겸직(兼職), 당상관(堂上官), 실직(實職), 판사(判事)
하위어동지사(同知事), 지감찰사사(知監察司事),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 지경연사(知經筵事), 지공조사(知工曹事), 지군부사사(知軍簿司事), 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지민부사(知民部事), 지민조사(知民曹事),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지병조사(知兵曹事), 지사헌부사(知司憲府事), 지삼사사(知三司事), 지상사국사(知尙舍局事), 지상서공부사(知尙書工部事), 지상서도성사(知尙書都省事), 지상서병부사(知尙書兵部事), 지상서예부사(知尙書禮部事), 지상서이부사(知尙書吏部事), 지상서형부사(知尙書刑部事), 지상서호부사(知尙書戶部事), 지상식국사(知尙食局事), 지상의국사(知尙衣局事), 지선부사(知選部事),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지언부사(知讞部事), 지예의사사(知禮儀司事), 지예조사(知禮曹事), 지원봉성사(知元鳳省事),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지의조사(知儀曹事), 지이부사(知理部事), 지이조사(知吏曹事), 지전공사사(知典工司事), 지전리사사(知典理司事),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지통례문사(知通禮門事), 지합문사(知閤門事), 지훈련원사(知訓鍊院事)
분야정치
유형직역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돈녕부·의금부 등에 소속되어 겸직하던 정2품 관직.

[개설]
고려시대에는 소속 관부에 따라 지성사(知省事)·지원사(知院事)·지부사(知部事)·지부사(知府事)·지사사(知司事)·지관사(知館事) 등으로 불렸다. 고려 성종대부터 상서육부(尙書六部)에 설치되었고 점차 다른 관서로 확대되었다. 문종대 관제 개정 과정에서는 중서문하성의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비롯해 상서성·중추원·삼사, 이부·병부·호부·형부·예부·공부 등의 상서육부, 어사대(御史臺)·어서원(御書院)·합문(閤門)·대부시(大府寺)·태사국(太史局)·첨사부(詹事府) 등에 두었다. 외직으로는 동북면·서북면의 지병마사(知兵馬事)와 서경의 지서경유수사(知西京留守事), 주·군(州·郡)의 지주사·지군사 등이 있었다. 다른 관원이 겸하였으며, 품계는 지문하성사와 중추원 지사가 종2품이고, 지주사 등은 5품 이상에 해당되어 일정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통상적으로 ‘지(知)’ 자를 관서명 앞에 붙여 호칭하는데, 예를 들어 지돈녕부사·지경연사 등과 같다. 모두 겸직이며, 초기에는 관서마다 품계가 달랐으나, 『경국대전』 단계에 이르러 정2품으로 정리되었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 문무백관 관제 반포 시 중추원에 종2품으로 2명, 경연관에 정2품으로 2명, 형조도관(刑曹都官)에 종3품으로 1명, 각문(閣門)에 종3품으로 2명씩 설치되었다. 이후에도 중앙 관서인 순군부(巡軍府), 순군부가 개칭된 의금부, 문서응봉사(文書應奉司), 삼군부, 춘추관, 사간원을 비롯해 육조 등에 설치되었다. 지방 관서인 동북면 단주와 경성군(鏡城郡)·경원부(慶源府)·갑주·청주(菁州)를 비롯해 춘주(春州) 등에도 설치되었다.

이후 『경국대전』 단계에 이르러 돈녕부·의금부·경연·성균관·춘추관·중추부·훈련원 등의 관서에만 설치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정원은 돈녕부에 1명, 의금부에 1명, 경연에 3명, 성균관에 1명, 춘추관에 2명, 중추부에 1명, 훈련원에 1명 등이다. 이 관직은 돈녕부에 소속된 관원 외에는 모두 다른 관원이 겸직하였다.

[담당 직무]
고려시대에는 해당 관서의 장관과 함께 관서의 업무를 주관하였다. 예컨대 지병부사에 재직하던 정균의 경우 무신의 선발을 담당하였다. 병부 시랑으로 지형부사에 재직하던 정운경의 경우에는 형부의 고유 업무인 소송 업무에 도당(都堂)이 관여하자 부당함을 개진하였다. 이처럼 지사들은 소속 관서의 업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다.

반면 조선시대에는 대부분 명예직으로 실제적인 업무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설치된 관서 가운데 지중추부사는 원임(原任)의 문신 재상이 주로 제수되었다. 지훈련원사는 동반(東班)대제학(大提學)에 대비되는 무신들의 명망가를 제수하는 자리로 인식되었다[『중종실록』 17년 11월 15일]. 지훈련원사의 경우 간혹 무신 선발과 관련된 무과의 운영이나 무신들의 교육 등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기도 하였다. 지경연사의 경우, 경연에 참석하여 진강(進講)하거나 국정 운영에 대해서는 논하였다. 지성균관사는 성균관 업무를 감독하는 한편 유생들과 함께 전문(箋文)을 올리기도 하였다[『성종실록』 15년 12월 7일]. 지의금부사는 죄인의 법률 적용을 비롯해 국문에 참석해 죄인의 심문을 담당하거나, 죄인의 처벌을 감독하는 등을 담당하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3월 16일].

[변천]
고려후기 원 간섭기하에서 지사 직제는 변천을 거듭하였다. 이는 고려말까지도 진행되어 공민왕대인 1356년과 1362년, 1368년의 관제 개혁 당시 부활과 폐지를 반복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경국대전』의 규정이 거의 조선후기까지 유지되는 가운데 일부 관서 소속의 지사에 대해서는 인사 규정이 추가되기도 하였다. 『속대전』에서는 지중추부사에 의관이나 역관도 제수할 수 있도록 개정되었다. 『대전통편』에서는 지돈녕부사에 대원군 봉사손(奉祀孫)이 도정(都正)에서 품계가 올라갈 경우에 제수하도록 하였고, 지성균관사는 대제학이 겸하도록 규정이 추가되었다.

지사 직제는 고종대 이후 관서의 개정 과정에서도 대부분 존속되었다. 1894년(고종 31) 의금부를 의금사로 개칭하면서 지사를 두었다가 다음 해에 의금사가 고등재판소로 바뀌면서 폐지되었다. 1894년에는 내시사(內侍司)가 설치되면서 지사 1명을 두었고, 돈녕부를 돈녕원으로 개칭하면서도 지사 직제는 유지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김송희, 『조선초기 당상관 겸직제 연구: 동반 경관직 임시직을 중심으로』, 한양대학교 출판부, 1998.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2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1995.
■ 한충희, 『조선초기 관아연구』, 사람, 2005.
■ 권영구, 「고려전기 상서6부의 판사·지사제」, 『역사와현실』 76, 2010.

■ [집필자] 이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