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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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농제(先農祭)

서지사항
항목명선농제(先農祭)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중사(中祀)
하위어신농(神農), 후직(后稷)
동의어적전제(籍田祭)
관련어선농단(先農壇), 선잠제(先蠶祭), 적전(籍田), 적전단(籍田壇), 친경(親耕)
분야왕실
유형의식 행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동교(東郊) 선농단(先農壇)에서 풍년을 빌기 위하여 농업신인 신농(神農)후직(后稷)에게 바쳤던 제사.

[개설]
선농제는 조선시대 제사체계 중 중사(中祀)의 하나이다. 선농단에서 농업신인 신농과 후직에게 제사하여 풍년을 빌었으며 제사 시기는 경칩(驚蟄) 뒤의 길한 해일(亥日)을 썼다. 제사 후에 왕이 적전(籍田)에서 친경례(親耕禮)를 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초기에는 선농제를 왕이 친행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관원이 선농제를 섭행(攝行)할 경우 향과 축문을 친전(親傳)하는 일이 있었을 뿐이었다[『세종실록』 6년 2월 4일].

1475년(성종 6) 왕이 선농제를 친히 거행하고 나서 적전에서 친경하였다[『성종실록』 6년 1월 25일]. 그러나 친경을 행할 때마다 선농제를 친히 행한 것은 아니었다. 선농제를 지낼 때 재계 기간 중 하루는 재궁(齋宮)에 가서 오직 제사와 관련된 것만 생각하며 지내야 했다. 그러므로 선농 친제의 경우 왕이 하루 전에 흥인문(興仁門) 밖 전농리(典農里) 동적전(東籍田) 선농단으로 가서 재숙하였다.

선농제를 섭사(攝祀)로 지내고 친경만 하는 경우에는 당일 아침에 출궁하였다. 친경의궤가 남아 있어 행사의 전모가 잘 알려진 1767년(영조 43)의 친경은 선농제를 대신에게 섭행시켰던 경우이다. 당일 진전(眞殿)에 나아가 전배례를 행하고, 황단(皇壇)에 가서 봉심(奉審)을 마치고 동단(東壇)에 나아가 친경례를 행하였으며, 예를 마치고 친경대(親耕臺)로 돌아와 노주례(勞酒禮)를 행하라고 명한 뒤 환궁하였으므로 친경 당일 새벽의 선농제는 섭사였음이 분명하다[『영조실록』 43년 2월 26일].

선농제는 후비가 행하는 선잠제(先蠶祭)와 대응하는 의미의 제사였다. 이는 민생과 관련된 제사로 조선시대 내내 중시되었다. 조선초기 원단 제사가 폐지된 후 사직의 기곡대제가 확립되기 전까지 약 200여 년 동안에는 선농제가 기곡(祈穀)의 의미를 담아 행해지기도 하였다.

[연원 및 변천]
조선초에 선농단을 축조하고 선농제를 지냈다. 태종 초까지는 제사 시기가 맹춘(孟春) 4일이었는데, 예조(禮曹) 전서(典書) 김첨(金瞻) 등이 상소하여 정월에 선농제를 지내는 것은 진(秦)나라의 법이고 한(漢), 당(唐), 송(宋)에서는 모두 2월을 썼다는 점과 우리나라의 1월은 너무 춥다는 점을 들어 건의하였기 때문에, 경칩(驚蟄) 뒤의 길일을 택하여 지내는 것으로 바꾸었다[『태종실록』 1년 12월 21일].

1413년(태종 13)에 선농제를 중사로 편성하였고, 1414년(태종 14)에는 선농단의 제도를 보고받았으며, 1416년(태종 16)에는 선농단에 재실(齋室)을 설치하였다[『태종실록』 16년 9월 12일]. 이렇게 선농단의 제도를 정비하였지만 선농에 친제를 지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도 선농단 주위의 영역을 사방 100보(步)로 설정하고 그 안에 소나무를 심도록 하였고[『세종실록』 6년 1월 20일], 각 도 단유(壇壝)를 정비하도록 하였으며[『세종실록』 12년 12월 8일] 토단이어서 잘 무너졌던 것을 전석으로 쌓도록 바꾸는 등 선농단과 관련된 여러 제도들을 정비하였다.

조선전기의 선농제 시기는 대개 경칩 뒤의 해일이었다. 그러나 조선초의 규정이 경칩 뒤의 길일을 택하자는 것이었으므로 해일이 아닌 날을 쓴 사례도 1440년(세종22), 1460년(세조 6)의 2사례가 존재하였다. 이 시기에는 선농 친제가 아니라 대신 섭사의로 운영되었으므로, 선농제 날짜를 택할 때 굳이 해일에 구애되지 않고 기후를 보고 적절히 택일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일을 쓰느냐 쓰지 않느냐의 문제가 쟁점이 된 것은 처음으로 선농 친제를 행한 성종대에 와서였다. 선농제를 길한 길해(吉亥)에 치르게 된 것은 1493년(성종 24)이었다. 본래 선농제의 날짜를 2월의 길한 해일로 정했지만, 비가 내려 다시 택일을 하게 되자 늦더라도 해일을 쓰는 안과 해일에 구애되지 않고 빠른 길일을 택하는 안이 제시되었다. 이에 왕이 직접 선농단의 친제 날짜를 해일로 선택한 것을 계기로 하여, 선농제는 경칩 뒤 해일을 쓰는 법이 확정되었다[『성종실록』 24년 2월 28일]. 선농제는 중사에 불과하였지만, 원구제가 천자의 예로 여겨져 폐지된 후 기곡의 욕구가 선농제로 옮겨지면서 중시되었다[『중종실록』 7년 10월 6일].

[절차 및 내용]
선농제는 산재(散齋) 3일, 치재(致齋) 2일이었으며 왕이 친제할 경우 초헌(初獻)은 왕, 아헌(亞獻)은 왕세자, 종헌(終獻)은 영의정(領議政)이 하였다. 희생(犧牲)은 중뢰(中牢)를 썼다. 제사 참여자들의 재계와 진설(陳設), 희생과 기물을 점검하는 성생기(省牲器)가 미리 이루어졌다.

제사 당일 제사 참여자들이 각각 자리에 나아가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한 뒤 왕이 손을 씻고 주신인 신농에 세 번 향을 올렸다. 그 다음 폐백을 드리는 전폐례(奠幣禮)를 행하였다. 같은 예를 후직에게도 행한 다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신농과 후직에게 각각 초헌례를 행하고, 초헌관(初獻官)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 다음 아헌관(亞獻官)이 아헌례를 행하고, 종헌관(終獻官)이 종헌례를 행하였다. 그 다음 음복(飮福)·수조(受胙)를 행하는데, 초헌관이 술잔을 다 마신 다음 조육(胙肉)을 받아 집사자(執事者)에게 준다. 제기인 변(籩)가 두(豆)를 옮기는 철변두(撤籩豆) 하고 나서 네 번 절하고, 초헌관은 망예위(望瘞位)로 나아가서 축판, 폐백, 서직반(黍稷飯)을 묻는 것을 본다. 알자(謁者)가 “예필(禮畢)”이라고 아뢰고 헌관(獻官)이 나간다. 나머지 집사자들도 사배례를 하고 나가면, 전사관(典祀官)이 신위판을 거두어 보관하고 예찬(禮饌)을 거둔 다음 물러간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박소동, 『국역친경친잠의궤』, 민족문화추진회, 1999.
■ 김지영, 「英祖代 親耕儀式의 거행과 『親耕儀軌』」, 『한국학보』107, 2002.
■ 박정자, 「이조초기의 적전고」, 『숙대사론』5, 1970.
■ 이욱, 「조선전기 유교국가의 성립과 국가제사의 변화」, 『한국사연구』118, 2002.
■ 장지연, 「권력관계의 변화에 따른 東郊 壇廟의 의미 변화 - 근대 先農壇과 東關王廟를 중심으로」, 『서울학연구』36, 2009.
■ 한형주, 「조선초기 중사제례의 정비와 그 운영 - 민생과 관련된 치제를 중심으로」, 『진단학보』89, 2000.

■ [집필자] 강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