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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원래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전사한 자국의 군사들을 위하여 전장(戰場)에 세운 제단으로, 흔히 정동관군사(征東官軍祠)라고 불렀다. 조선 조정은 전쟁 중에는 그 제사를 시행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대주는 방식으로 관여하였지만, 명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제사를 직접 이어받아 시행하였고 조선말기까지 이를 유지하였다. 민충단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왔던 명나라의 병부(兵部) 상서(尙書) 형개(邢玠)와 경리(經理) 양호(楊鎬)를 제사하는 사당인 선무사(宣武祠)와 더불어,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내세워 명군을 추모한 대표적인 제사 장소였다.
[위치 및 용도]
민충단은 대규모 전투가 벌어져 전몰장병이 많았던 지역에 주로 설치되었다. 도성 근처에는 홍제원(弘濟院)에 있었고, 평안도의 평양, 경기도의 벽제(碧蹄), 경상도의 안강(安康) 등에도 설치되었다. “전장 근처에 대략 땅을 닦고 나무를 세워 ‘칙사민충단(勑賜愍忠壇)’이라 쓰고, 우선 국명(國命)으로 그 옆에서 제사한다.”[『선조실록』 26년 윤11월 24일]는 기록으로 볼 때, 제단의 형태는 인귀(人鬼)를 모시는 묘(廟)가 아니라 자연신을 모시는 단(壇)의 형태를 취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제단의 형태는 사묘(祠廟)로 건립된 선무사와는 다른 방식이다.
[변천 및 현황]
민충단에 대한 제사는, 1593년(선조 26) 윤11월에 명나라의 요동도사(遼東都司)가 평양·벽제·왕경 등에 제단을 설치하고 진중(陣中)에서 죽은 명군을 제사한다고 전하자, 이에 대응하여 조선 조정에서 전장 근처에 나무를 세우고 ‘칙사민충단’이라는 글을 내려 제사하도록 조처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제사는 조선에 파견되어 있던 명나라 장수가 주관하거나 명나라 조정에서 따로 관리를 보내 지내는 방식으로 치러졌다. 명나라에서 별도로 제관(祭官)을 파견하지 않았고, 그에 따라 조선 조정이 이어서 제사를 주관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전에 제사는 일시적으로 폐지되었다.
1657년(효종 8) 6월, 전국에 여역(癘疫)이 성행하자 경외(京外)의 산천, 성황 및 북교 등에서 여제(癘祭)를 지냈는데, 이때 민충단에도 관리를 보내 여제를 시행하면서 제사가 재개되었다. 여제는 원래 억울하게 죽었음에도 제사를 받지 못하는 귀신들에게 지내는 제사인데, 제사의 대상에 ‘전장에서 국가를 위해 죽은 자’가 포함되었기 때문에 민충단에서도 제사를 지낸 것이다. 1679년(숙종 7) 5월에는 가뭄이 심해지자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처럼 여제 및 기우제를 시행하게 되면서 민충단은 전몰장병에 대한 추모라는 본래의 의미에서 벗어나게 되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현종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한편 1704년(숙종 30)에는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준 명나라 신종(神宗)을 제사하는 대보단(大報壇)이 창덕궁 후원에 설립되었는데, 이후 민충단의 제사는 대보단의 제사와 함께 거행되었다. 대보단과 민충단의 제사가 결합된 것에 대해 1775년(영조 51) 당시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였던 유의양(柳義養)은, 민충단이 임진왜란 때 신종황제의 성지(聖旨)를 받들어 설립된 것이기 때문에 신종을 모시는 대보단의 제사와 뜻이 같다고 설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