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둑은 군대의 위용을 상징하는 군기로, 정벌 대상의 머리를 창에 꿴 그림을 그려놓았다. 둑제 때는 둑 4개를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보게 배치하였다. 둑제는 정기적으로 경칩(驚蟄)과 상강(霜降)에 지냈으며, 군대가 출병할 때에도 반드시 지냈다[『명종실록』 10년 6월 9일]. 헌관(獻官)은 병조(兵曹) 판서(判書)가 맡았는데 유고시에는 병조 참판(參判)이 대행하였으며, 전사관(典祀官)은 훈련원(訓鍊院) 주부(主簿)가 맡았다. 둑제에 참여하는 사람은 모두 갑옷과 투구를 갖추었다. 중앙의 둑소(纛所) 및 지방의 병영·수영 등에서도 둑제를 지냈다. 둑제는 조선시대의 사전(祀典) 체제에서 보기 드문 군사 관련 제의였으며, 이러한 특수성은 또 다른 군사 관련 제의인 마제(禡祭) 등이 조선후기에 이르러 거의 시행되지 않게 되면서 더욱 강해졌다.
[연원 및 변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군례(軍禮) 서례(序禮)에는 둑에 대하여, ‘치우(蚩尤)의 머리와 같다.’고 하였다. 즉 강력한 적을 정벌한 뒤 그 위엄을 과시하는 상징물이었던 것이다. 중국에서 둑이 제사의 대상이 된 것은 1001년(송 함평 4) 무렵이며, 명나라 때에 이르러 기둑묘(旗纛廟)의 신을 모시는 정기적인 제사를 둑제라 부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전래된 둑제는 고려시대에 도관(道觀)인 태청관(太淸觀)에 의해 시행되었으므로 도교적인 성향이 강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1393년(태조 2)에 홍둑(紅纛)과 흑둑(黑纛)을 만들고 처음으로 둑제를 지냈다[『태조실록』 2년 1월 16일].
1393년 처음 둑제를 지낼 때는 어떤 음악을 사용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같은 해 7월에 정도전(鄭道傳)이 여러 악장을 지었는데, 그중에서 이성계(李成桂)가 원나라 장수 나하추[納哈出]를 물리친 일을 노래한 ‘납씨가(納氏歌)’와 위화도 회군을 찬양한 노래인 ‘정동방곡(靖東方曲)’을 이후 둑제에 사용하였다[『태조실록』 2년 7월 26일]. 그리고 다음 해인 1394년(태조 3)에는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이던 정도전이 둑제를 주관하였다. 정도전은 이 시기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으며 2월에는 10위를 10사로 개혁하는 것을 비롯한 병제 개혁안을 상서하였는데[『태조실록』 3년 2월 29일], 이는 공신 및 왕자들의 사병을 크게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둑제를 주관하였다는 것은 군권을 장악하였다는 의례적 상징성이 컸다. 정도전이 둑제를 지낸 다음 날 제의에 참여하지 않은 장수들에게 태형(笞刑)을 가한 것[『태조실록』 3년 1월 28일]도 자신을 반대하는 이들에 대한 징계였을 것이다. 군권의 향방이 중요하였던 조선초기의 정치 상황에서 둑제가 지닌 상징성은 여타 제의에 비해 훨씬 구체적인 것이었다.
세종대에 이르러서는 봄과 가을에 지내는 둑제를 소사(小祀)의 규례로 확정하였다[『세종실록』 3년 7월 19일]. 1440년(세종 22)에는 예조(禮曹)에서 둑제 의주(儀註)를 정하였다[『세종실록』 22년 6월 13일]. 이 시기 의례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둑제는 유교식 국가 의례로 정착하게 되었다.
둑제의 제사 대상인 둑에는 대·중·소의 크기 구분과 홍둑·흑둑·청둑의 색상 구분이 있었다[『세종실록』 6년 9월 10일][『성종실록』 1년 9월 4일]. 둑제를 지낸 장소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하지만 둑제를 제대로 행하지 못한 지방의 병사(兵使)를 처벌하였다는 기록, 큰 군기[纛]가 있는 곳의 제사에는 병조 판서를 헌관으로 보내고 악장 역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쓴다는 기록[『정조실록』 17년 11월 6일] 등을 볼 때 군기가 있는 군영, 특히 병영(兵營)이나 수영(水營)에서 둑제를 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둑제에 참여하는 무관들은 갑옷과 투구를 갖추어 입었다. 헌관들은 갑옷에 립(笠)을 썼는데, 1795년(정조 19) 병조 판서 심환지(沈煥之)의 건의로 헌관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갑옷에 투구를 쓰게 되었다[『정조실록』 19년 2월 25일]. 둑제는 조선말기까지 계속해서 시행되었으나, 1908년(융희 2) 둑신묘의 제사를 연 1회로 정한 뒤, 군대해산을 즈음하여 없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절차 및 내용]
1440년(세종 22)에 예조에서 둑제의 의주(儀註)를 정하였다. 이 내용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국조오례의』에 반영되었다.
이에 따르면 둑제의 헌관은 소사의 규례에 따라 산재(散齋) 2일, 치재(致齋) 1일의 재계를 하며, 무복을 갖춘 여러 제관과 훈련원 관원들이 예에 참여한다. 먼저 집사자들이 네 번 절을 하는 사배례(四拜禮)를 하고 다음으로 손을 씻고, 술잔을 씻는다. 그 뒤 헌관과 배제관(陪祭官)들이 들어와 네 번 절하고 손을 씻는다. 집사자가 신위에 세 번 향을 올리는 삼상향(三上香)을 하고, 헌관이 정해진 폐백을 올리는 예인 전폐(奠幣)를 한다.
악생(樂生)들이 간척무(干戚舞)를 춘다. 이때 초헌례(初獻禮)를 행하는데, 초헌관(初獻官)이 술잔을 올리고 축문을 읽는다. 그 다음 간척무를 춘 악생들이 물러가고 궁시무(弓矢舞)가 이어진다. 아헌관(亞獻官)이 술잔을 올린다. 궁시무를 춘 무리가 물러가고 창검무(槍劍舞)를 춘다. 종헌관(終獻官)이 마지막 세 번째 술잔을 올린다.
음복(飮福)과 수조(受胙)를 행한다. 제기를 거두는 것을 상징하는 철변두(撤籩豆)를 한 뒤 헌관과 배제관이 모두 네 번 절한다. 헌관이 망예위(望瘞位)로 가서 축판(祝板)과 폐백(幣帛)을 묻는 것을 지켜보면 예가 끝난다.
병조 판서 이하 훈련원 관원을 중심으로 거행되는 의례이자 무관들이 주도하는 유일한 의례였다. 『악학궤범(樂學軌範)』에 따르면, 무관이 아닌 악공들도 둑제에 참여할 때는 무복을 입고 투구를 쓰도록 하였는데, 군사와 관련된 강력한 상징성을 시각적으로 드러내 보이도록 한 것이었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둑제는 조선말기까지 시행되었는데, 그에 따라 제사에 사용된 음악들도 오랜 세월 전승되었다. 특히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주장한 ‘납씨가(納氏歌)’와 ‘정동방곡(靖東方曲)’은 둑제와 함께 근대까지 전승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둑제가 폐지되면서 전하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