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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숙종 때, 임진왜란 당시 원병을 보내준 명나라 신종(神宗)을 제사하기 위하여 창덕궁 후원에 세운 제단.
[개설]
명나라가 멸망한 지 60년 되는 해인 1704년(숙종 30) 1월 10일에 숙종이 임진왜란 때 원군을 파병해 준 명나라 신종의 은혜와 병자호란의 치욕을 언급하다가, 나라를 다시 세워준 신종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갚기 위해 그를 위한 새로운 사묘(祠廟)를 건립할 것을 주장하면서 그 명칭이 처음 등장하였다. 하지만 사묘의 건립 여부는 여러 문제 때문에 쉽게 결정되지 못하고 거의 1년 동안이나 논의가 이어졌다. 결국 대보단은 같은 해 12월 21일에야 비로소 창덕궁 후원에 단(壇)의 형태로 설립되었다. 대보단이 건립된 뒤에는 3월 상순에 한 차례 제사를 지냈는데, 왕이 몸소 주관하였다.
그 뒤 영조와 정조 시대를 거치면서 명나라의 건국자인 태조(太祖)와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이 제사 대상에 추가되었고, 제사의 횟수도 연 1회에서 7회로 늘어났으며, 왕의 친제 횟수 역시 증가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순조 이후 고종대까지 이어졌으나,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없어지게 되었다.
[위치 및 용도]
대보단은 창덕궁 금원(禁苑) 서쪽 요금문(曜金門) 밖, 옛 별대영(別隊營) 자리에 위치하였다. 처음에는 예조(禮曹) 판서(判書) 민진후(閔鎭厚)의 주관 아래 내빙고(內氷庫) 자리에 제단을 마련하였지만, 그가 수어사(守禦使)로 제수되어 남한산성으로 부임하고 예조 참판(參判) 김진규(金鎭圭)가 담당하면서 별대영 자리로 위치를 옮기게 되었다.
대보단에 대한 제사는 흔히 ‘존주양이(尊周攘夷)’, ‘복수설치(復讎雪恥)’를 바탕으로 대명의리론(大明義理論)을 내세운 조선중화(朝鮮中華) 의식의 상징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명나라의 멸망으로 인해 끊어진 천자의 제사를 조선 왕이 대신한다는 상징성을 취하려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설행되었다.
대보단을 설립할 때 인귀(人鬼)를 모시면서도 사묘(祠廟)가 아니라 신을 모시는 설단(設壇)의 형식으로 조성하였고, 1년에 단 한 번, 그것도 명나라가 패망한 3월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비상설적인 운영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제사의 대상이 명나라의 황제이고 조선의 왕이 직접 거행하는 제사임에도 대사(大祀)로 설정하지 않음으로써, 종묘의 권위가 훼손되는 것을 막고 청나라의 간섭을 예방하였다. 당시 숙종은 대보단의 제사를 사대(事大)의 지극한 정성으로 여겼다. 이러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대보단의 설립은 중화의 계승보다는 왕의 권위를 강조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변천 및 현황]
대보단이 처음 설치되었을 때 제사의 대상은 명나라 신종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749년(영조 25)에 대보단의 단유(壇壝)와 신좌(神座), 신탑(神榻) 등을 명나라 제도에 맞추는 대규모의 증·보수가 이루어졌다. 이때 나라의 태조와 마지막 황제인 의종을 제사 대상에 포함시킴으로써 태조·신종·의종 세 황제를 함께 제사 지내게 되었다. 이어 1762년(영조 38)에 명나라 태조에게는 서달(徐達)을, 신종에게는 이여송(李如松)을, 의종에게는 범경문(范景文)을 각각 종향(從享)시킴으로써 제사 대상을 좀 더 체계화하였다.
제사는 처음에는 1년에 한 차례, 명나라가 패망한 3월에 지냈는데, 1749년(영조 25)에는 세 황제의 기일 및 즉위일에도 망배례(望拜禮)를 시행함으로써 제사의 횟수가 크게 늘어났다. 세 황제의 기일에는 명나라의 후손과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 때 순절하거나 의리를 지킨 충신·열사·의인의 후손들을 대거 망배례에 참여시켰다. 망배례는 좁은 대보단이 아니라 창덕궁의 정전(正殿)이나 경희궁의 숭정전(崇政殿), 춘당대(春塘臺) 등 사람이 많이 모일 수 있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이루어졌다. 망배례에 참여한 후손들의 수는 1796년(정조 20)에는 156명이었는데, 1800년(정조 24)에는 239명으로 증가하였다.
[형태]
대보단은 1704년 10월 3일에 공사가 시작되어 12월 21일에 완성되었다. 대보단은 명나라의 황제들을 제사함에도 불구하고 인귀를 모시는 사묘가 아닌 설단의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이것은 예제의 기본 원리에 어긋나지만, 제후국의 왕이 천자의 제사를 지내는 것은 분수에 넘치는 일이라는 주장, 이 사실이 청나라에 알려지면 사달이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 종묘보다 예우를 높일 경우 나라의 체면이 손상될 수 있다는 등의 이유 때문에 사묘가 아닌 설단의 형식을 취한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제사를 지낼 때는 사묘에서처럼 단 앞에 장전(帳殿)을 세우고, 그 안에는 황색 지붕에 장막이 삼면에 드리워진 방 모양의 휘장인 황방장(黃房帳)을 만들어 여기에 신탑과 신좌를 두고 의식을 진행하였다.
대보단은 조선의 사직단 모양을 모방하여 만들었는데, 단을 둘러싼 낮은 담인 유(壝)와 담장인 장(墻)이 있었다. 단의 높이는 사직단보다 1척 높은 4척이고, 사방의 넓이는 25척씩이며, 사면의 계단은 9급(級)이었다. 유장(壝墻)은 사면이 모두 37척이며, 별도로 외장(外墻)을 쌓아 행인들이 들여다보는 것을 막았다.
1749년(영조 25)에는 대보단을 증축하면서 기존 시설을 보수하는 동시에 추가로 시설물을 배치하였다. 기본 시설로는 방형(方形)의 단(壇)을 중심으로, 바깥 담장 동쪽에 신좌와 신탑을 보관하는 봉실(奉室) 3칸과 재계 장소인 재전(齋殿) 3칸을 두었다. 담장 밖 남서쪽에는 향실(香室)과 전사청(典祀廳) 5칸, 재생청(宰牲廳) 2칸, 악생청(樂生廳) 4칸 등이 있었으며, 그밖에 단의 바깥 남쪽 담장에 중문인 열천문(冽泉門)과 그 외곽에 또 다른 문인 공북문(拱北門) 등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