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기고제는 신에게 기원할 때 지내는 기제(祈祭)와 아뢸 것이 있을 때 지내는 고제(告祭)가 합쳐진 것이다. 조선 성종 때 편찬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서례(序例)」에 따르면, 홍수·가뭄·전염병·메뚜기 떼 등으로 인해 피해가 발생했을 때, 혹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데, 절박할 경우 좋은 날을 점쳐서 가리지 않고 바로 시행하였다. 또 봉책(封冊)이나 왕실의 관례, 혼례 등을 비롯하여 나라에 큰일이 생겼을 때는 반드시 신에게 고(告)하였다.
기고제는 국가 사전(祀典) 체제에 정식으로 편입된 일부 대상에게만 소사(小祀)에 준하여 시행되었다. 기제는 사직(社稷)·종묘(宗廟)·풍운뇌우(風雲雷雨)·악해독(嶽海瀆)·명산대천(名山大川)·우사(雩祀) 등을 대상으로 하고, 고제는 사직과 종묘 등에 한정되었다.
기고제 중에서 고제가 국가 혹은 왕실의 특별한 경사나 불행을 고하는 일시적인 성격이 강하다면, 기제는 일반 백성들의 농업 생활과 관련된 경우가 많았다. 특히 기우제의 경우 여름철이 되면 거의 매년 시행할 정도로 그 빈도가 높았다.
[연원 및 변천]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당시에는 주로 산천(山川)에 제사를 지냈는데, 그 의식과 절차는 전통적인 무속 의례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사찰에서 시행되는 불재(佛齋)가 보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중국의 오례(五禮)를 수용함에 따라 기고제가 유교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고려사(高麗史)』 「예지(禮志)」에 따르면, 환구단(圜丘壇)에서 기곡제(祈穀祭)와 기우제를 지냈으며, 종묘에서는 정기적인 제사 외에 기도 및 주고(奏告)를 시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환구와 종묘, 사직 등에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고하거나, 환구·종묘·사직·산천 등에 각종 기우제와 기양제(祈禳祭)를 지낸 사례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고려시대에 들어와 유교적인 의식과 절차의 기고제가 보편적인 의례로 정착되었음을 알려준다. 물론 사찰에서 각종 기우제를 시행하거나, 도교적인 색채를 지닌 초제(醮祭)가 성행하였음을 보여주는 사례 역시 상당히 많다. 그뿐 아니라 기우·기양을 위해 시행한 산천제에도 유교적인 면보다는 오히려 무속이나 도교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 있어, 과연 유교적인 기고제가 절대적이었는지 의심스러운 면이 있다. 기고제가 완전히 유교화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기고제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전보다 좀 더 유교적인 면모를 강하게 지니게 되었다. 기제의 중요한 대상인 산천이 고려시대에는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구분한 유교적 사전(祀典) 체제에 포함되지 않은 잡사(雜祀)의 대상이었는데, 조선시대에는 그 규모와 중요도에 따라 악해독(嶽海瀆)과 명산대천(名山大川)으로 구분하여 각각을 사전 체제에 편입하였다. 아울러 종묘·사직·풍운뇌우·악해독·명산대천에 대한 정례(正禮)와 더불어, 별도로 기고하는 의식인 기고의(祈告儀)도 설정·운영하였다.
『국조오례의』에는 종묘·사직·풍운뇌우·악해독 등 중사의 대상에 대한 기고는 2품의 제관(祭官)이 담당하고, 소사의 대상인 명산대천에 대한 기고는 정3품관이 각각 담당한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 왕의 친제(親祭)에 대한 규정은 설정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이러한 기고의 방식은 중종대 이후 바뀌게 된다. 1530년(중종 22) 가뭄이 극심해지자 5월에 왕이 사직에서 친히 기우제를 지냈고, 6월에는 종묘에서 기우제를 올렸다. 1537년(중종 32)에는 건국 후 한 번도 찾지 않았던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에 나아가 직접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왕도 정치의 구현을 명분으로 왕이 몸소 제사를 지내는 친제는 명종대에도 그대로 이어졌고, 숙종 및 영조·정조대를 거치면서 기우제의 보편적인 형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기존에 행하던 종묘·사직·풍운뇌우단에 대한 제사 외에 악해독에 지내는 기우제도 친제로 거행하였다. 영조 때 편찬된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와 정조 때 편찬된 『춘관통고(春官通考)』에는 ‘친제악해독기우의(親祭嶽海瀆祈雨儀)’, ‘친향우사단기우의(親享雩祀壇祈雨儀)’, ‘친향선농기우의(親享先農祈雨儀)’ 등이 수록되어 있어, 왕이 친히 시행하는 각종 기우 의식이 정식으로 국가 사전 체제에 편입되었음을 보여준다.
[절차 및 내용]
기고제는 제사의 목적과 대상에 따라 그 형식과 절차가 다르기 때문에 일괄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친제와 섭제(攝祭)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다. 섭제는 제사의 등급이 소사이기 때문에 3일간의 재계를 거친 뒤 돼지 1마리를 희생으로 삼아 거행된다. 이때 종묘·사직·풍운뇌우·악해독에 제사를 지낼 때는 2품관, 명산대천의 경우 정3품관 1명이 각각 제관 역할을 맡는다. 기고제는 재계, 진설, 희생 등의 준비 과정을 마친 뒤 행례(行禮)가 이루어진다. 행례는 폐백을 올리는 전폐(奠幣)와 술을 올리는 전작(奠爵), 그리고 축문을 읽는 일련의 과정으로 구성되는데, 전작이 초헌·아헌·종헌의 3헌례가 아니라 1헌례에 그친다는 점에서 정례(正禮)와는 차이가 있다.
친제의 경우, 재계와 희생 등을 소사에 준한다는 점에서는 섭제와 유사하다. 그러나 왕이 제사를 주관하기 때문에 왕의 출궁 및 환궁과 관련된 제반 의식, 위차 등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특히 헌관(獻官) 1명으로 구성되는 섭제와 달리 왕의 친제에서는 아헌관(亞獻官)과 종헌관(終獻官)이 따로 차정되었고, 그 결과 작헌(酌獻)은 1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왕의 초헌(初獻) 및 신하들의 아헌(亞獻)·종헌(終獻) 등 총 3헌례로 진행되었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기고제는 국가 제사에만 한정된 의례가 아니었다. 일반 사대부 집안에서도 사당에서 기고제를 지냈다. 일상적으로 집을 드나들 때도 사당에 고하였지만, 집안에 중대한 일, 특히 관직 제수·추증(追贈) 및 관례·혼례 등의 경사나 혹은 화재·도적 등의 흉사가 생기면 반드시 사당에 고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기고제 중에서도 기제를 거행할 경우에는 유교적 의례만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가뭄과 해충, 전염병 등 재앙을 물리치기 위해 기도하는 과정에서는 피해 당사자인 백성들의 문화양식인 무속 신앙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강을 비롯한 하천에서 용왕제(龍王祭)를 지내거나 산천제에 국무당(國巫堂)을 파견한 일 등은 유교적인 기제에 민간 신앙을 다소나마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통치자들의 문화 의식이 드러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