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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왕세자의 교육과 관련한 관직명으로 진선(進善)은 인조반정 직후에 등장한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한 반정 공신들은 정권의 기반 확보와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사림들의 지지가 절실히 필요하였다. 이에 반정 공신들은 사림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재야 산림들을 광범위하게 초빙하였다. 여기에는 수많은 사림을 문하생으로 거느린 산림들을 중용함으로써 산림의 영향 아래 있던 사림을 반정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정치적 계산이 깔려있었다.
반정 세력들은 산림을 초빙하면서 그들을 위한 산림직(山林職)을 따로 설치하였는데, 성균관의 겸좨주[兼祭酒], 사업(司業) 그리고 세자시강원의 찬선(贊善), 진선, 자의(諮議) 등이 대표적인 산림직이었다. 가장 먼저 설치된 것은 성균관의 사업으로 1623년(인조 1) 5월에 설치되었다. 또한 세자시강원의 산림직은 1646년 5월에 김상헌의 건의에 의해 설치되었다.
『경국대전』의 규정에 의하면 세자시강원의 전임 관원은 문과 출신이어야 임명될 수 있었다. 하지만 산림들은 과거 시험을 치지 않았다. 이에 송나라 때의 고사를 모방하여 재야의 학자들을 산림이라는 명목으로 초빙하게 되었다. 당상관은 찬선(贊善)이라 하여 이전의 전임 관원인 보덕(輔德) 위에 두고, 당하관은 익선(翊善)이라 하여 문학(文學) 아래에 두며, 참하관은 자의라 하여 설서(說書) 다음에 두었다. 이 중에서 익선의 경우 이미 세손강서원에도 사용하던 직명이었다. 이 때문에 세자시강원의 익선은 세손강서원의 익선과 혼동될 수 있었고, 또 위상에 대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었다. 이에 1648년 8월에 세자시강원의 익선을 진선으로 바꾸게 되었다. 당시 왕세손 현종을 위해 세손강서원 설치가 논의되던 때라 시강원과 강서원 사이의 혼동을 피하고 둘 사이의 위상도 분명히 하기 위해 시강원의 익선을 진선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이것이 『속대전』에 규정되었는데, 찬선은 정3품, 진선은 정4품, 자의는 정7품이었다.
[담당 직무]
진선은 ‘선을 진보시킨다.’는 의미이다. 조선시대의 세자는 장차 왕이 될 신분이므로 세자의 제왕학 교육 목표 역시 세자 개인의 선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백성들의 선까지도 개발·육성하는 데 있었다. 조선후기에 저명한 재야 학자를 진선으로 임명하여 세자의 품성과 학문을 진보시키게 함으로써 세자의 선에 대한 학문적 기초와 실천적 토대를 확립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변천]
1894년(고종 31) 7월 관제 개정 시 시강원이 궁내부 예하에 편입될 때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황제 체제가 성립되면서 세자시강원 역시 황제 체제에 맞추어 황태자시강원으로 바뀌었다. 아울러 조선시대의 세자익위사 역시 황태자익위사로 바뀌었다. 하지만 황태자시강원에 소속된 관원의 명칭이나 지위는 이전과 같았다. 대한제국 멸망 후 황태자시강원은 이왕직(李王職) 서무계(庶務係)에 흡수·통합됨으로써 황태자시강원에 소속된 진선 역시 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