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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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추쇄도감(奴婢推刷都監)

서지사항
항목명노비추쇄도감(奴婢推刷都監)
용어구분전문주석
동의어추쇄도감(推刷都監)
관련어공노비(公奴婢)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공노비 추쇄를 위해 임시로 설립한 특별 관청.

[개설]
노비추쇄도감(奴婢推刷都監)은 조선시대에 공노비를 추쇄하기 위하여 설치한 임시 기관이다. 노비 추쇄란 도망가거나 숨겨진 노비를 찾아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는 것을 말한다. 조선초기에는 노비를 대장에 올리지 않고 숨기는 은루(隱漏) 노비나 원래 속한 곳에서 도망친 도망 노비가 많았다. 때문에 정부에서는 정기적으로 공노비를 추쇄하여 보다 많은 공노비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전국적인 노비 추쇄는 세조에서 효종 때까지 약 6차례 이루어졌고, 1655년(효종 6) 이후에는 노비추쇄도감이 설치되지 않았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추쇄도감에서 추쇄의 대상은 공노비에 한한다. 조선시대 공노비의 추쇄는 각사 노비의 경우 3년[式年]마다, 내노비의 경우 10년을 기한으로 각 관아에서 실시하였다. 그리고 각 도에 흩어져 사는 여러 관서의 노비는 20년에 한 번씩 추쇄하였다. 이처럼 정기적으로 공노비를 추쇄해도 은루 노비나 도망 노비의 숫자는 매우 많았다. 실제로 1484년(성종 15)에 실시한 추쇄에서 은루·도망한 경외 노비가 261,984명이었고, 지방 고을과 역노비는 90,581명이었다[『성종실록』 15년 8월 3일]. 이처럼 공노비 가운데 은루·도망한 노비를 전국적으로 추쇄하기 위하여 임시로 설치한 특별 관청이 노비추쇄도감이다. 추쇄도감의 설립 목적이 공노비를 추쇄하기 위한 것임은 1513년(중종 8)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중종실록』 8년 11월 11일].

[조직 및 역할]
추쇄도감은 당상관(堂上官)과 당하관인 낭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추쇄도감의 당상관은 정1품 관원으로 겸직인 도제조(都提調) 1명이고, 종1품~종2품인 제조(提調)가 3~5명 정도 있었다. 낭청은 1478년의 추쇄도감사목에 의하면 별감(別監) 2명과 도청(都廳) 6명이고, 이들이 6방(房)을 나누어 맡았다. 각 관서의 노비는 그 관서의 해당 관원과 함께 추쇄하였고, 종친부(宗親府)·의정부(議政府)·충훈부(忠勳府)·대간(臺諫)·정조(政曹)는 그 관사의 해당 서리(書吏)를 통해 간접적으로[憑問] 추쇄하였다. 추쇄도감사목에 의하면 추쇄도감의 하급 실무는 전례에 따라 차정하여 공사(公事)를 고과(告課)하던 녹사(錄事) 2명과 서리가 있었다. 서리 역시 전례에 따라 형조(刑曹)·장례원의 나장(羅匠)과 그 관사의 일을 잘 아는 노자[事知奴子]로 하였다[『성종실록』 9년 12월 2일].

1657년 7월의 『추쇄도감의궤』에는 총책임자인 도제조 1명은 의정부의 정승급이 맡았고, 제조 13명 내외는 판서급이 담당하였다. 도청(都廳)은 4명, 낭청은 16명이었고, 실무 관리자인 감조관(監造官)은 당하관에서 임명하였다. 행정 지원은 산원(算員) 3명, 집사(執史) 2명, 도청서사(都廳書寫) 2명, 서리 9명, 고직(庫直) 2명, 도사령(都使令) 6명 등이 맡았다.

설립할 때마다 조직 인원이 조금씩 달랐던 것은 추쇄도감이 필요에 따라 설립되는 특별 기구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본래 추쇄도감의 제조 이상 관원은 문신(文臣)으로 재신(宰臣)이 맡는 것이었으나, 이들은 맡기를 꺼려하였다.

노비추쇄도감의 기본 업무는 공노비의 등록 장부를 관리하면서 이들 가운데 도망하거나 은루된 자들을 색출하는 것이었다. 단, 추쇄 시 고문이 행해지고 뇌물이 오고 가는 등 부정이 있었다.

[변천]
조선시대 공노비 추쇄는 일정한 기간마다 행하는 것으로 되어있으나 실상은 공노비 추쇄가 필요할 때마다 간헐적으로 추쇄도감이 설치되었다.

조선시대 추쇄도감은 1457년(세조 3, 『역대요람』), 1468년(세조 14, 『역대요람』), 1479년(성종 10,『잠곡유고』), 1484년(성종 15,『연려실기술』·『임하필기』), 1513년(중종 8,『조선왕조실록』), 1514년(중종 9,『연려실기술』·『역대요람』·『잠곡유고』), 1556년(명종 11,『잠곡유고』), 1655년(『잠곡유고』·『조선왕조실록』) 등 대체로 8차례 정도 설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추쇄도감은 10년에서 40년 정도의 간격으로 설치되었다. 그러나 1556년에서 1655년까지 약 100년 동안은 한 번도 설치되지 않았다. 이는 추쇄할 때 추쇄 관원들의 횡포로 백성들이 괴롭힘을 당하였고, 도감의 관리를 대접하느라 예하 관원들이 번거로웠으며, 정부가 2~4년간 노비 추쇄에 집중하여 행정 낭비가 심하였기 때문이었다. 공노비 추쇄를 위한 추쇄도감의 설치는 1655년을 마지막으로 이후에는 설치되지 않았다.

[참고문헌]
■ 『잠곡유고(潛谷遺稿)』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역대요람(歷代要覽)』
■ 김두헌, 「조선 효종대의 노비추쇄에 대한 재검토: 『추쇄도감의궤』 분석을 중심으로」, 전북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9.
■ 김안숙, 「효종연간 노비추쇄도감설치의 배경과 성격」, 『교남사학』 2, 1986.
■ 이수건, 「조선 태종조에 있어서의 대노비시책」, 『대구사학』 1, 1969.
■ 이지우, 「조선조 태종의 사노비정책」, 『경대사론』 10, 1997.

■ [집필자] 성봉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