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고려후기 상서(尙書) 6부의 낭중(郎中)이 조선시대에 정랑(正郞)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초인 1405년(태종 5)에 육조를 정2품 아문으로 승격하여 각사를 속아문으로 소속시키자, 속사의 책임자인 정랑의 행정상 위상이 확보되었다. 청요직(淸要職)으로서 위상이 확립된 정랑은 육조의 행정 관행이 쌓이면서 낭관의 연대(連帶)가 형성되어, 조선중기에는 더욱 영향력이 커졌다. 그러다 조선후기에 비변사가 정치 행정을 주도하면서 위상이 약화되었다. 담당자를 장무낭청 또는 색낭청(色郎廳)이라 하였다[『명종실록』 20년 11월 7일].
[담당 직무]
육조의 정랑은 속사의 실무 책임자였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육조의 각 속사의 직무는 다음과 같다.
판적사(版籍司)는 호구·토전·조세·부역·공헌(貢獻)·권과농상(勸課農桑)·풍흉고험(豊凶考驗)·진대·염산(斂散) 등을 맡는다. 회계사(會計司)는 서울과 지방의 저적(儲積)·세계(歲計)·해유(解由)·휴흠(虧欠) 등을 맡는다. 경비사(經費司)는 서울의 지조(支調)와 왜인의 양료 등을 맡는다.
3) 예조
계제사(稽制司)는 의식·제도·조회·경연·사관(史官)·학교·과거·인신(印信)·표전(表箋)·책명(冊命)·천문·누각(漏刻)·국기(國忌)·묘휘(廟諱)·상장(喪葬) 등을 맡는다. 전향사(典享司)는 연향·제사·생두(牲豆)·음선(飮膳)·의약 등을 맡는다. 전객사(典客司)는 사신과 왜·야인의 영접, 외방의 조공, 연설(宴設), 사여 등을 맡는다.
상복사(詳覆司)는 살인 사건을 자세히 심의[詳覆]한다. 고율사(考律司)는 율령·안핵(按覈)의 일을 맡는다. 장금사(掌禁司)는 형옥·금령의 일을 맡는다. 장례사(掌隷司)는 노예의 부적(簿籍)·부수(俘囚) 등의 일을 맡는다.
6) 공조
영조사(營造司)는 궁실·성지(城池)·공해(公廨)·옥우(屋宇)·토목·공역·피혁(皮革)·전계(氈罽) 등의 일을 맡는다. 공야사(工冶司)는 백공의 제작, 금(金)·은(銀)·주옥(珠玉)·동(銅)·납(鑞)·철(鐵)의 야주(冶鑄), 도와(陶瓦)·권형(權衡) 등의 일을 맡는다. 산택사(山澤司)는 산택·진량(津梁)·원유(苑囿)·종식(種植), 탄(炭)·목(木)·석(石), 주거(舟車)·필묵(筆墨)·수철(水鐵)·칠기(漆器) 등의 일을 맡는다.
[변천]
1) 고려의 정랑
상서의 6부를 4사로 개편하면서 속사인 고공사와 도관(都官) 등의 낭중을 1275년(고려 충렬왕 1)에 정랑으로 개칭하였다. 1356년(고려 공민왕 5) 문종 관제를 부활시키면서 정랑은 다시 낭중으로 바뀌었다가 6사로 개편되면서 정랑으로 개칭되었다. 1369년 6사가 6부로 개편되면서 직랑(直郞)으로 고쳤으나, 1372년 6사 체제가 복구되면서 다시 정랑이 되었다. 1389년(고려 공양왕 1)에는 6사가 6조로 바뀌면서 조선으로 이어졌다.
2) 조선초의 정랑
태조 초의 관제에서는 각 조마다 2명이 표준이었으나 이조에는 정랑 1명과 고공정랑 1명이 설치되었고 형조의 도관에 각 2명을 더 두었다. 1405년 육조를 2품 아문으로 승격하면서 각 조에 3명씩을 두었는데, 병조와 형조에는 1명씩을 더 두어 4명이었다[『태종실록』 5년 1월 15일]. 이어 속사의 사무 분장을 정하였다[『태종실록』 5년 3월 1일]. 그리고 조 단위로 인사이동을 하던 낭관을 속사 단위로 인사이동을 하도록 하여 속사의 자율성을 높였다[『태종실록』 17년 12월 8일]. 정랑은 임기를 채우면 4품으로 승진하였다.
육조가 맡은 일을 왕에게 바로 보고하고 처리하며 국정의 중심 기구가 되자, 각 조의 실무를 책임지는 정랑의 위상도 높아졌다. 그 일을 맡는 사람을 장무(掌務)라 하여 ‘장무정랑’ 등으로 불렀다.
『경국대전』에 이조·병조·예조의 정랑·좌랑은 문관으로만 임용하도록 규정하였다. 이들을 낭관·낭청 또는 조랑(曹郎)이라 하였다. 이조와 병조의 정랑·좌랑은 인사 행정을 담당하여 전랑(銓郎)이라 하였다.
3) 조선중기의 정랑
육조의 정랑은 좌랑과 함께 낭관으로서 집단적인 정치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특히 이조 문선사와 병조 무선사의 전랑은 당상관들의 회의에 참석해 후보 명단[望單]을 작성하는 일을 맡았다. 이들 전랑은 다른 낭관들과는 달리 음서의 혜택을 주는 등 다른 조의 낭관들과 다른 대우를 받았다. 이조 문선사의 정랑은 삼사(三司) 관직과 같은 청요직의 임명 제청권을 행사하였다. 이를 통청권(通淸權)이라 하였는데, 이조 전랑은 통청권으로 삼사 관원의 인사권을 장악하여 언론과 탄핵권을 지배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조 정랑과 병조 정랑은 관행적으로 자신의 후임자를 추천하였는데, 이를 전랑자대(銓郎自代) 또는 전랑법(銓郞法)이라 하였다. 이조 전랑을 둘러싼 다툼은 1575년 동서분당(東西分黨)의 한 계기가 되었다. 붕당 정치기에 이조 전랑은 재상 못지않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선조 즉위 초의 『조선왕조실록』에 현임의 육조 낭관의 명단이 실린 데서 그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선조실록』 즉위년 11월 7일].
4) 조선후기의 정랑
조선후기에는 여러 차례 통청권과 전랑법을 제한하였다. 전랑법이란 이조와 병조의 현임 낭관이 후임 낭관을 추천하던 법이다. 또한 18세기 이후 노론의 일당(一黨) 전제(專制) 정치가 확립되면서 정랑의 권한은 약해졌다. 1741년(영조 17)에는 통청권이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으며, 1789년(정조 13) 이후에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나중에 『속대전』 단계에서는 형조의 정랑 1명을, 『대전통편』 단계에서는 이조의 정랑 1명을 줄였다. 비변사에서 정치와 행정을 장악하게 되자 육조 정랑의 위상은 더욱 낮아지고 영향력도 줄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