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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사직서는 조선시대 사직의 제사 지내던 터, 즉 단유(壇壝)의 청소를 담당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이다. 예조(禮曹)에 속하였으며 종5품 아문이었다. 사직단은 1395년(태조 4) 종묘와 함께 설립되었으며, 1426년(세종 8)에는 종7품 아문으로 사직서를 두고 종7품 승(丞) 1명, 종9품 녹사(錄事) 2명을 두었다. 이후 관련 제도들을 확충하고 관서의 급을 종7품 아문에서 종5품 아문으로 격상시켰다. 사직서는 사직단 밖 북쪽에 관사가 있었다. 사직단과 주변 지역, 신실 등을 살펴보고 개수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사직단은 1395년 종묘와 함께 설립되었다. 종묘에는 이른 시기부터 종묘서가 설치되었지만, 사직단은 단으로 관리되다가 1426년에야 종7품 아문으로 사직서를 두었다.
1426년 이조(吏曹)에서는 사직단을 승격시켜서 서(署)로 삼고자 하였다. 당나라 제도에 따르면 교사서(郊社署)의 영(令) 1명이 종7품으로 태상시(太常寺)에 소속되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로써 승 1명은 종7품으로, 종묘서의 승 아래에 서열을 두고 봉상시주부(奉常寺主簿)가 겸임하도록 하였다. 단지기[壇直] 2명은 녹사(錄事)로 삼았고, 서리(書吏)는 품등이 같은 전옥서(典獄署)의 서리 7명 중 2명을 감하여 배정하였다. 이는 사직단의 위상을 승격시키고 이에 대한 관리 체계를 갖추는 것이었다.
1451년(문종 1) 실안제조(實案提調)와 제조(提調) 각 1명을 설치하였는데, 실안제조는 좌의정(左議政)이 겸임하였다. 1466년(세조 12)에는 승 대신 종5품의 영을 두었다가 이후 다시 바뀌었다.
[조직 및 역할]
『경국대전』에는 도제조(都提調)가 1명으로 시·원임대신(時·原任大臣)이 겸임하도록 하였고, 제조는 1명으로서 정2품 관원이 겸임하도록 하였다. 이 외에 영 1인, 종9품의 참봉 2명을 두도록 규정하였다.
이후 숙종대 종7품 직장(直長) 1명과 종8품 봉사(奉事) 1명이 새로 설치되고 참봉 2명이 없어졌다. 1725년(영조 1)에는 봉사를 영으로 개편했고 문신에서 뽑았다. 이속은 서원(書員) 1명, 고직(庫直) 1명, 수복(守僕) 8명, 사령(使令) 5명, 군사(軍士) 7명 등을 두었다.
사직서의 입직관원(入直官員)은 5일마다 사직단과 토담을 살펴보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신실(神室)을 살펴보았다. 만일 개수할 곳이 있으면 예조에 보고하였다.
[변천]
1882년(고종 19) 영 1명을 더 늘려 2명으로 하였고 1명은 문관이, 1명은 음관이 임명되었다. 1895년 포달(布達) 제1호에서 사직서는 궁내부(宮內府) 소속으로 편제되면서 칙임관 제거(提擧) 1명, 영과 판임관 참봉 각 1명으로 바꾸었다. 1900년의 포달 제64호에는 사직서령 1명을 2명으로 개정하기도 하였다. 1908년(융희 2) 국가의 모든 제사가 폐지되는 가운데 사직단의 제례가 폐지되었으며, 1911년 사직서의 건물과 부지는 총독부에 인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