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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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숭도감(追崇都監)

서지사항
항목명추숭도감(追崇都監)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도감(都監), 추숭(追崇)
관련어추숭도감의궤(追崇都監儀軌), 부묘도감(祔廟都監), 국장도감(國葬都監), 봉원도감(封園都監), 존숭도감(尊崇都監)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왕의 사친에 대하여 사후에 칭호를 올리는 의식과 절차를 주관하던 임시 관청.

[개설]
조선시대에는 왕의 아버지나 어머니이면서도 왕이나 왕비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선조, 광해군, 인조, 영조, 정조 등이 대표적으로, 이들은 왕이 된 후에 사친을 추숭하는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추숭도감을 설치하였다. 추숭도감은 독립적으로 구성되기도 했으나, 업무의 추진에 따라 존숭도감이나 부묘도감·국장도감·봉원도감(封園都監)과 함께 운영되는 경우도 많았다. 추숭 작업은 존숭 의식, 부묘 의식, 국장 의식과 긴밀히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추숭도감 설치 때 전대의 사례를 참고했는데, 『현종실록』에는 “강화부에 지춘추(知春秋) 조복양을 보내 임신년의 『추숭도감의궤』를 가져오게 하였다.”[『현종실록』 10년 9월 17일]고 하여 이를 확인케 해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연산군이나 광해군처럼 어머니가 왕비로 대접받지 못하거나, 정조처럼 아버지가 왕으로 되지 못한 경우 부모님의 추숭을 위해 추숭도감을 설치하였다. 추숭도감에서는 사친의 위호 회복, 사당에서의 제사, 종묘의 부묘 등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추숭도감이 처음 설치된 기록은 『연산군일기』에 나온다. 연산군은 생모인 폐비 윤씨의 추숭 작업을 추진하여, 제헌왕후로 추숭하고 무덤을 ‘윤씨지묘’에서 ‘회릉’으로 개칭하였다. 제헌왕후를 모신 사당은 혜안전(惠安殿)이라 하였다. 연산군대 추숭도감에서는 혜안전의 제기(祭器) 조달, 회릉의 석물 및 수호군 배치 등을 주관하였다. 연산군대의 전례를 이어 광해군은 1610년(광해군 2) 생모인 공빈(恭嬪)을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숭하고 봉자전(奉慈殿)에 모시는 사업을 주관하기 위해 추숭도감을 설치하였다.

[조직 및 역할]
추숭도감에는 총책임자인 도제조와 부책임자인 제조가 당상관으로 배치되고 도청(都廳)과 낭청을 뽑아 실무를 주관하게 하였다. 현재 전해지는 『추숭도감의궤』의 「좌목(座目)」 기록을 보면, 도제조 1~3인, 제조 3~9인, 도청 2인, 낭청 7~12인, 감조관(監造官) 등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 1632년(인조 10) 『인조실록』에는 “영의정 윤방을 추숭도감 도제조로, 이귀·김신국·최명길·박동선을 제조로, 정홍명·김남중 등을 도청으로, 이후양·정두경·박이립·이명전·왕보신·황윤후 등을 낭청으로 삼았다.”[『인조실록』 10년 2월 24일]고 기록하여 추숭도감 조직의 실례를 보여 주고 있다. 추숭도감에서는 추숭 대상 인물의 옥책과 금보를 제작하고, 봉안처를 선정하는 등의 실무를 맡았다.

[변천]
『조선왕조실록』에는 『연산군일기』에 처음 추숭도감을 구성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추숭도감 관련 기록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광해군일기』여서, 광해군이 사친의 추숭 작업에 큰 관심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광해군일기』의 기록에 왕후 추숭도감의 칭호를 왕후 부묘도감으로 고치고 부묘청의 명칭을 『실록』에서 고출하라고[『광해군일기』 7년 6월 19일] 한 것으로 보아 추숭도감은 왕후를 종묘에 모신 후에는 부묘도감으로 칭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존숭도감이 설치된 뒤에 비로소 추숭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비록 두 도감을 따로따로 설치하지 않고도 당상과 낭청을 한두 명씩 더 차출하거나 혹은 본 도감의 당상과 낭청 중에서 아무아무를 추숭도감으로 정하여 추숭에 관한 일만 전담하도록 하였으나 지금은 따로따로 설치해야 좋을 것 같습니다.”[『광해군일기』 12년 11월 10일] 하는 기록에서, 존숭도감과 추숭도감이 합하여 운영되다가 따로 분리되는 상황도 볼 수 있다. 존숭도감과 추숭도감은 업무의 성격이 비슷하기 때문에 이러한 혼동이 온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추숭도감에 관한 기록은 인조·현종·정조대에 때때로 나온다. 『정조실록』에는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효순 현빈을 효순왕후로 추숭하는 사업을 추숭도감에서 전담하게 하였다. 그 후에 추숭도감을 국장도감에 합하여 설치하도록[『정조실록』 즉위년 3월 19일] 명하여 추숭도감이 국장도감과 함께 설치·운영되는 사례를 보여 준다. 또한 사도세자의 무덤을 영우원(永祐園)으로 개칭한 과정을 주관한 봉원도감을 추숭도감과 함께 설치·운영한 사례도 나타난다. 연산군·광해군대에 생모의 추숭을 위해 추숭도감을 설치한 전례를 이어, 추숭도감은 정조대에는 사도세자의 추숭 작업을 주관하였다.

[참고문헌]
■ 『광해군사친추숭도감의궤(光海君私親追崇都監儀軌)』
■ 『진종추숭도감의궤(眞宗追崇都監儀軌)』
■ 『문조추숭도감의궤(文祖追崇都監儀軌)』
■ 서울대학교 규장각 편, 『규장각 소장 분류별 의궤 해설집』,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5.
■ 서울대학교 규장각 편, 『규장각 소장 의궤 종합목록』,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2.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국학진흥연구사업추진위원회 편, 『장서각 소장 의궤 해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
■ 한영우, 『조선왕조의 의궤: 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

■ [집필자] 신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