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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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관(摠管)

서지사항
항목명총관(摠管)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겸직(兼職),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관련어군영(軍營), 군제(軍制), 궁궐(宮闕), 도진무(都鎭撫), 도총관(都摠管), 명예직(名譽職), 부총관(副摠管), 병조(兵曹), 부장(部將), 사소(四所), 삼군(三軍), 생기(省記), 순감군(巡監軍), 순장(巡將), 숙위(宿衛), 시위(侍衛), 오위겸부장(五衛兼部長),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오위진무소(五衛鎭撫所), 왕(王), 위장(衛將), 인정(人定), 입직(入直), 전좌(殿座), 직소(直所), 직숙(直宿), 총관(摠管), 파루(罷漏), 행순(行巡), 행재소(行在所), 행행(行幸), 호위(扈衛)
분야정치
유형직역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전기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관직인 도총관·부총관·문총관·무총관의 총칭.

[개설]
조선초기 중앙군의 조직이 오위(五衛)를 중심으로 하면서, 그 총괄 관서인 오위도총부가 설립되었다. 오위도총부의 관제에서 도총관과 부총관이 설치되었으며 이 직책들을 통칭 총관(摠管)이라고 하였다. 물론 총관이라는 명칭은 어떤 일이나 부서를 담당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사료에서 나타나는 ‘총관’은 오위도총부의 총관이 아닌 것도 다소 있다. 그러나 궁궐의 숙위(宿衛), 왕의 호위와 관련한 직책을 의미할 때는 오위도총부의 도총관과 부총관을 의미하였으며, 조선후기에는 문총관과 무총관도 포함하였다.

[담당 직무]
1676년(숙종 2) 총관순장혁파(摠管巡將革罷)를 논의하면서 총관의 직책이 오래전부터 실제 내용이 없으며, 오위의 제도가 행할 수 없는 지경이라고 하였다. 다만 조종조(祖宗朝)의 옛 제도라는 이유 때문에 경솔히 혁파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총관이 오위도총부 소속이며, 조선전기 군사(軍事) 제도의 근간인 5위에 의해 움직인 점을 감안한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조선후기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군영 중심으로 군제가 바뀌어 5위 중심의 군제는 더 이상 존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중앙군의 핵심이 훈련도감과 어영청, 금위영 등의 군영으로 옮겨졌고, 오위도총부의 기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왕의 시위(侍衛)와 궁궐의 숙위도 군영에서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숙종대에는 비변사의 유사당상(有司堂上)이 총관으로 궁궐의 직소(直所)에 장기간 배속되었다.

총관의 지위가 조선전기와 달리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서반직(西班職)의 최고 부서에 문관(文官)이 배치되는 변화가 있었다. 1857년(철종 8년) 오위도총부의 총관에 문관과 무관(武官) 각 한 사람씩을 임용하였다. 도총부에 문관이 배치되는 것은 세조대에도 있었다. 1466년(세조 12)에는 오위도총부의 도총관과 위장(衛將), 부장(部將)이 모두 사대부(士大夫)의 직책을 겸무(兼務)하고 있었다.

세조대 총관들은 목장(牧場)을 설치하는 일과 온천[溫井]을 찾아보는 것 등 군사 이외의 일도 담당하였다. 성종대 총관들은 경복궁의 경우 낮에는 북수각(北水閣)에 있다가 밤에는 숭문당(崇文堂)의 차비문(差備門) 밖으로 근무 장소를 옮겼고, 1년을 임기로 하여 관직을 그만두었다.

궁궐 문을 규정에 따라 관리하지 못한 총관들은 1489년(성종 20)의 경우 장(杖) 1백 대와 3천 리 유배에 처하였고, 관직 임명장인 고신(告身)을 모두 빼앗겼다.

연산군대에는 4명의 총관이 있었다. 1520년(중종 15)에는 2품 이상의 육조 당상이나 의정부 당상으로 총관을 겸하게 할 정도로 총관의 위상이 높아졌다. 영조대인 1752년(영조 28)에는 총관이 숙위를 빠뜨리자, 비록 5위의 제도가 약해졌지만 숙위하는 아문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총관을 파직하였다. 이처럼 총관의 직책은 그 위상이 떨어지는 가운데에서도 중요시되기도 했다. 반면 정조대인 1783년(정조 7)에는 강세황(姜世晃)을 특별히 승진시켜 도총관으로 삼았는데, 강세황의 나이가 71세였다. 1794년에는 이시수(李時秀)를 특별히 발탁하여 도총관으로 삼았다. 이시수가 금방 상을 마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정조대 이후 도총관은 더 이상 군무(軍務)를 맡는 중책이라기보다는 임시로 부여되는 명예직으로 전환되었다.

이후 고종대까지 총관 제도가 유지되었다. 『대전회통』에 의하면 오위도총부의 관제에는 도총관 5명, 부총관 5명, 경력(經歷) 6명, 도사(都事) 6명, 서리(書吏) 13명, 사령(使令) 20명 등이 구성되었다. 그중 도총관 5명과 부총관 5명은 다른 관서의 관리 가운데 겸임하되, 1년이면 관직에서 물러나야 하는 직책이었다. 따라서 총관은 임시로 왕과 궁궐의 시위를 책임지던 직책이었으며, 수시로 담당자가 바뀌는 자리였음을 알 수 있다.

[변천]
총관의 임무가 명예직으로 전환되는 시기는 정조대라고 생각된다. 1777년 궁궐 내의 숙위를 숙위대장(宿衛大將)이 모두 관할하였다. 위장·부장·금군도감(禁軍都監)의 군병·각 문의 수문장(守門將)·국별장(局別將)·궁궐 담장 밖 삼영(三營)에서 입직(入直)한 순라(巡邏)들이 모두 숙위대장에게 소속되었다. 그리고 도총부와 병조(兵曹)는 순찰하는 등의 일을 숙위대장에게 공문으로 보고해야 했으므로 도총관이 숙위를 담당할 여지가 없어졌다. 더욱이 조선후기로 갈수록 5위를 중심으로 하는 군제가 약화되어 오위도총부는 명색만 남고 쇠잔해졌다. 따라서 오위도총부가 숙위에 임하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총관은 이름만 남게 되었다.

1882년(고종 19) 관제 개편 때 감생청(減省廳)에서는 5위의 군제가 실속 없이 헛된 명성만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도총부를 혁파하고 총관은 모두 없애, 총관직도 사라졌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집필자] 이왕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