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정의]
인삼(Panax ginseng)의 뿌리를 그대로, 또는 가는 뿌리와 코르크층을 제거한 것.
[개설]
삼(蔘)은 기운을 보해 주는 작용이 아주 뛰어나며[大補元氣], 탈진해서 기력이 없을 때와 진액이 부족할 때 사용한다[固脫生津]. 마음을 안정시키는[安神] 등의 효능이 있다.
[산지 및 유통]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함길도, 평안도, 강원도, 황해도에서 생산되는 토산물이다.
[약재화 방식 및 효능]
음력 2월, 4월, 8월에 채취하여 가는 뿌리와 코르크층을 제거한다.
오장을 보하고 정신을 안정시키며 잘 놀라는 증상을 낫게 하고 사기(邪氣)를 몰아낸다. 눈을 밝게 하고 정신을 맑게 하며 배 속이 찬 증상을 없애 준다. 명치 밑이 불러 오르면서 아픈 것, 가슴과 옆구리로 기(氣)가 치밀어 그득한 것, 곽란, 구역질하면서 토하는 것 등을 치료한다. 속을 고르게 하고 소갈을 멈추게 하며 혈맥을 잘 통하게 하고 단단한 적취(積聚)를 헤친다. 기억력을 좋게 하고 장기간 먹으면 몸이 거뜬해지고 오래 산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인삼은 대대로 고려인삼이라고 불렀다. 이 고려인삼의 명칭은 도홍경(陶弘景)이 지은 『본초경집주(本草經集注)』에 처음 나오는데, "인삼은 백제의 것을 중요시하는데, 모양은 가늘지만 단단하고 희며 기운과 맛은 상당삼보다는 부드럽다. 다음으로는 고려산을 사용하는데, 고려는 바로 요동이다. 모양은 크지만 속은 성글고 연하여 백제의 것보다 못하다. 백제는 현재 고려의 신하국이므로 사신이 가져오는 것은 고려산과 백제산 두 가지이다. 오로지 사용처에 맞추어 골라 사용할 뿐이다. 실제로 사용해 보면 (중국의) 상당삼보다는 못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문헌의 기록 이래로 중국의 거의 모든 약재 전문 서적에서는 고려인삼의 우수성을 역설하고 있다. 문헌에 나오는 ‘고려(高麗)’라는 명칭은 삼국을 통일한 고려가 아닌 고구려(高句麗)의 당시 이름이다.
일제강점기 때 상해에 조선 상인들이 많이 건너가서 활동했는데, 대부분이 인삼 상인과 비단 상인이었다. 1909년 3월까지의 집계만 보더라도, 인천에서 직항선을 통해 상해로 수입된 인삼의 총량이 12,000근이었다고 한다. 육로나 연경(燕京)을 거쳐 가는 무역 항로까지 합하면 그 수출량은 어마어마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대부분 상해에서 소비되었다고 하며, 특히 상해에 조차지(租借地)를 가지고 있는 유럽 열강들의 외교관 저택에서 상당량을 구입했다고 한다. 당시 고려인삼의 유명세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정조실록』에는 "우리나라 백성들의 괴로운 고통 중에서 인삼의 폐단이 가장 심한데, 그 폐단을 말하기는 쉽지만 폐단을 바로잡기는 어렵다. 오히려 폐단을 바로잡자는 주장은 없고 다만 영문(營門)에서 공물(貢物)을 마련하려는 한 가지 일만을 바야흐로 곧 폐단을 없애는 가장 좋은 요점으로 삼고 있다."고 하였다[『정조실록』 9년 2월 1일]. 무역품으로서는 좋은 인삼이 실제 백성들에게는 고통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종실록』에는 의정부에서 인삼을 밀매하던 죄인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인삼이 값비싼 약재로서 유통되었던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고종실록』 1년 6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