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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지방의 감영·병영, 중앙의 군문(軍門)에 소속되어 각 기관의 대장을 수행하는 기간병.
[개설]
아병은 조선후기에 설치된 군병(軍兵)이었다. 아(牙)는 대장기(大將旗)를 의미하는 것으로 아병은 대장을 뒤따르며 임무를 수행하는 병사였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지방관이 아병을 거느릴 수 있었다. 17세기에 오군영(五軍營)이 창설되고 산하의 기간병으로 아병이 조직되어 전국 각지에서 군역자가 아병으로 복무하였다. 아병은 임무에 따라 다양하게 불렸는데, 초아병(哨牙兵)·별아병천총(別牙兵千摠)·친아병(親牙兵) 등이 있었다. 중국의 한인(漢人)으로 편성된 아병도 있었는데, 이들은 1738년(영조 14) 한려(漢旅)로 개칭되었다[『정조실록』 14년 3월 19일]. 한양 인근의 유수부(留守府)에도 아병이 있었는데, 강화부에는 초아병 1명을 두었다. 아병은 소속 관서의 임무나 위치에 따라 적게는 1명, 많게는 몇 백 명이 배속되기도 하여 그 수는 일정하지 않았다. 아병을 유지하기 위하여 아병보(牙兵保)를 두었으며, 그들에게 군포(軍布)나 쌀을 징수하였다.
[담당 직무]
소속된 기관의 대장을 수행하였다.
[변천]
임진왜란 때 왜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지방관 밑에 군사를 모집하여 아병을 삼도록 하였다. 이때에는 수령도 아병을 수백 명씩 거느릴 수 있었다. 임진왜란 후에는 각 도의 감사(監司)에게 언제라도 군관과 아병을 대동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감사 이외에 지방에 소재하는 병영에도 병사(兵使) 산하에 아병이 있었다. 이 아병들은 물론 전문 군인이 아니라 농민 가운데 수시로 복무하게 하는 군역자였다. 따라서 이들을 정기적인 복무 이외에 군인으로 출동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17세기 전란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조정은 오위(五衛)를 개편하여 수도 경비를 주 임무로 하는 훈련도감(訓鍊都監)·어영청(御營廳)·총융청(摠戎廳)·수어청(守禦廳)·금위영(禁衛營) 등 오군영을 설치하였다. 여기서 삼수(三手)의 급료병을 둔 훈련도감을 제외하고 이들 군영에 말단 기간병의 하나로 수백 명의 아병이 설치되었다. 이들은 입번하는 군역(軍役)으로서 전국 각지에 할당되었다. 아병은 부(部)나 초(哨)라는 조직으로 구성되었다. 가령 1764년(숙종 즉위년) 총융청은 그 수하 조직에 친병(親兵)인 아병 10초와 둔아병(屯牙兵) 3초를 더하였다.
18세기 전반기를 통하여 중앙의 군문에 소속된 아병에 대하여 군문별·군현별 군액의 정원을 확인하고 실제로 군역을 부담할 수 있는 자들로만 채우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18세기 중엽에는 지방에 소재하는 감영·병영·수영·통영 등에 소속된 아병에 대해서도 이러한 군역 정액화(定額化) 작업이 진행되었다.
[참고문헌]
■ 『양역실총(良役實摠)』
■ 성고이성무교수정년기념논총 간행위원회 편, 『조선시대의 과거와 벼슬』, 집문당, 2003.
■ 김우철, 「조선 후기 개성의 지방군 운영의 변화 과정: 조련과 수미(收米) 문제를 중심으로」, 『한국사연구』 147,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