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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자보는 번(番)을 서거나 훈련을 하는 정군(正軍)에게 직접 군포를 바쳐서 노자(路資)·의복 등에 드는 비용을 제공하는 보인(保人)을 말하였다. 자보는 정군에게 개인적으로 직접 군포를 납부하였는데, 소속 기관에 군포를 바치는 관보(官保)와 납부 방식에서 대비되었다. 정군 1명에 자보는 1명, 혹은 2명이 배정되었고 나머지는 관보로 존재하였다. 정군이 보인으로 전환되면서 정군에 딸린 자보도 함께 관보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내용 및 특징] [변천]
양역변통(良役變通)을 한창 시행하던 1682년(숙종 8) 병조 판서 김석주(金錫冑)가 올린 「군제변통절목(軍制變通節目)」에 ‘자보’가 언급되었다[『숙종실록』 8년 3월 16일]. 병조나 훈련도감 소속 정병(正兵)과 자보를 정비하면서 남은 일부의 군병으로 금위영(禁衛營)을 창설하자는 건의였다. 1729년(영조 5)에는 군포의 부담을 반으로 줄이려는 정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자보의 군포 부담을 줄이는 문제가 논의되었다.
자보가 부담하는 군포는 정군에게 직접 납부되므로 소속 기관에서 일일이 통제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18세기에 들어서는 정군의 복무가 분담되고, 자보의 군포 납입 부담이 감소되었다. 소속 기관이 관보에게 징수한 군포를 정군에 대한 관리 비용으로 사용하는 방식도 확대되어 갔다. 따라서 정군과 자보를 현실적인 군사 수요에 대비하기 위하여 새로운 군오(軍伍)로 재편성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1779년(정조 3)에는 황해도의 군량을 수송하기 위하여 정군과 자보를 재편성할 것이 건의되었다. 이 안은 새롭게 군역 재원을 확보하여 군액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군보를 재편성하는 데 그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검토되었다[『정조실록』 3년 6월 1일].
18세기에는 군역의 역종(役種)별 정액화가 진행되면서 군역자 소속 기관의 재정 수입이 위축되었다. 한편, 군역 재원의 수요는 점점 증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따라 18세기 후반에는 정군을 관보로 전환시켜 정군에게 지급되는 자보의 수를 줄이는 방안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일시적으로 정군의 복무를 중단시켜 대신 정군에게 군포를 받고, 그 정군에게 배정된 자보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관보를 확대하거나 정군의 복무를 중단하는 데에만 의존하여 재정을 확보함으로써 인력 동원이 어려워지고 군대 체계 자체가 무너질 우려도 있었다.
[참고문헌]
■ 『양역실총(良役實摠)』
■ 손병규, 「18세기 양역 정책과 지방의 군역 운영」, 『군사』 39, 1999.
■ 정연식, 「조선 후기 ‘역총’의 운영과 양역 변통」,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