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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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정(直定)

서지사항
항목명직정(直定)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군역(軍役)
관련어대정(代定)
분야경제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역종별 군역 정원의 결원에 대하여 직접 대정하는 것.

[개설]
직정은 역종(役種)별 군역 정원에 결원이 발생하였을 때, 군역자를 재원으로 가지고 있는 중앙 관서나 군문(軍門), 지방 군영 등이 군역 대상자를 직접 대정(代定)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직정은 군역자를 직접 대정하는 데에만 사용되지는 않았다. 가령 중앙의 경차관(敬差官)이 도(道)에 들어와 관찰사의 개입 없이 임시로 일할 차사원(差使員)을 직접 뽑아서 쓰는 등의 일도 직정이라 하였다. 그러나 직정이라는 용어는 군역과 관련하여 그것을 금하는 상황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중앙과 지방의 국가기관들은 각 기관 소속 군역자를 직접 장악하고 또 그들에게 새로운 군역자를 찾아오게 하였다. 나아가 군역자들이 거주하는 지방에 사람을 직접 파견하여 새로운 군역자를 탐문하고 충당하였다. 이에 대하여 상급 기관의 군역자 직정을 금하고 지방의 관청을 통해서 군역자를 파악하도록 하였다. 이 직정 금지 조치는 소속별·역종별 군역의 액수(額數)를 고정시키고자 하는 군액 정액(定額) 사업 과정에서 수시로 취해졌다. 그리고 소속별·역종별 군액이 지방마다 정액화되어 공표되고, 지방관청에서 행정 구획 내의 군역자를 전반적으로 파악하게 되면서 상급 기관의 군역 직정 현상은 점차 사라졌다.

[내용 및 특징]
일본·청나라와 전쟁을 치른 후에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군역 재원을 확보하는 새로운 방안이 제기되었다. 기존의 중앙 및 지방관서에서 산발적으로 인력을 동원하고 재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추진해 온 활동을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의 군안(軍案)에는 실제로 군역을 부담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대거 등재되어 군역 부과를 실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특히 중앙의 관서와 군문은 군역 부담을 낮춘 역종을 만들어 소속자를 모집하는 등 기관마다 경쟁적으로 군역자 확보 활동을 벌였다. 중앙의 상급 기관은 지방 군현에 군역 재원의 제공을 요구하고 직접 군역 대상자를 수색하기도 하였다.

숙종대부터 정부는 소속별·역종별 군액의 정원을 설정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넘는 개별적인 군역자 모집을 사모속(私募屬)으로 규정하여 자의적인 군액 증대를 억제하기 시작하였다. 허구화한 군안을 실제 군역을 부담할 능력이 있는 자들로 채우고자 한 것이다. 또한 소속별·역종별로 군액을 고정시키고 액외(額外)의 사모속을 제거하였다. 대정할 때에는 소속 기관이 직접 대정에 나서지 않고 도(道)와 지방 본관(本官)이 개입하게 하였다.

하지만 중앙 기관 소속 군역에 대한 직정 금지는 곧바로 실현되지는 않은 듯하다. 1687년(숙종 13)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은 “15세 이하를 충군하는 것은 군역 대상자인 한정(閑丁)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고, 한정을 얻기 어려움은 경사(京司)에서 직정을 하기 때문이니, 마땅히 금해야 한다.” 하여 직정을 금지하자고 주장하였다[『숙종실록』 13년 12월 23일].

1704년(숙종 30)에는 다시 군역의 직정을 금하는 명령이 내려졌다.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에 의하면, 각 군문이 군역을 직정하는 폐단이 매우 많아 각 고을에서 이를 받들어 실행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또한 민간에서는 소란스럽고 어지러우니 중앙의 군문이 군역을 직정하는 일이 있으면 그 즉시 논죄한다고 하였다.

중앙 기관 소속 군역에 대한 역종별 군액을 확정하는 사업이 한창이던 1711년(숙종 37) 비변사에서는 「양역변통절목(良役變通節目)」을 만들었다. 「양역변통절목」에서는, 중앙과 지방의 각 아문(衙門)·군문·영문(營門)·영장(營將)에 소속된 각종 군역은 직정하지 못한다고 금령을 내렸는데 여전히 함부로 양정(良丁)을 모집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결원이 생겼을 때에 한해서 새로운 군역자를 충당하되 만일 직정하는 일이 있으면 지방관청은 일체(일절) 시행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감영에 보고하여 중앙에 계문(啓聞)하는 절차를 밟으라고 하였다. 비로소 중앙 기관 소속 군역만이 아니라 지방의 감영과 군영에 소속된 군역 역종에 대해서까지 직정을 금하는 조치가 취해졌던 것이다.

군역 직정을 막는 조치는 지방군현 단위로 소속별·역종별 군역의 액수를 확정하여 상급 기관의 군역자 확보 활동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이미 1727년(영조 3)에 제안되었다. 기사에 따르면 상사(上司)에서 부역(賦役)을 직정함으로써 본읍(本邑)에서는 실지의 수효조차 알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중앙에서 직정하는 명목과 군액을 각 읍에 알리면 본읍이 관문(關文)을 보내 대정하도록 하는 방안이 건의되었다.

실제로 양인 군역의 소속별·역종별 군액이 각 군현마다 정액(定額)화되어 전국에 공표된 것은 1740년대였다. 지방관청은 이때에 책자로 작성된 『양역실총(良役實摠)』의 액수에 따라 행정구역 내의 군역 대상자를 파악하여 역종별로 군역을 부담시켰다. 이렇게 지방관청에서 「읍안(邑案)」을 작성하여 군역자를 관리하게 되자 상급 기관의 직정이 행해질 여지가 없어졌다.

[참고문헌]
■ 『수교집록(受敎輯錄)』
■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
■ 『양역실총(良役實摠)』
■ 손병규, 「18세기 양역 정책과 지방의 군역 운영」, 『군사』 39, 1999.
■ 정연식, 「조선 후기 ‘역총’의 운영과 양역 변통」,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 [집필자] 손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