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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17세기 말부터 양인 군역의 재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자 하는 양역변통(良役變通) 방안이 논의되었다. 이 과정에서 모든 가호에 군포를 고르게 부과하자는 호포론(戶布論)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계층과 담세능력에 상관없이 모든 호에 균등하게 부담시키는 데 대한 반대 여론이 컸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구를 기준으로 하는 구전론(口錢論)이 제기되었다.
구전은 근본적으로 포(布)로 거두는 구포와 동일한 성격을 지녔다. 단지 구전은 구포보다 가분성(可分性)이 높다는 점이 달랐다. 군포를 인구마다 거두려면 여러 명이 모여야 최소한의 필수를 채울 수 있는 불편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주된 유통수단은 여전히 동전이 아닌 포였다. 동전이 부족해지는 전황(錢荒)의 상황까지 고려하면 구전의 시행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결국 구전과 구포 모두 그 시행에 번잡함이 따를 것이라는 우려와 함께 전답 결수에 따라 포로 거두는 결포(結布) 논의가 현실성을 띠게 되었다. 이에 구전론과 구포론은 논의에서 멀어져 갔다.
[내용 및 특징] [변천]
1702년(숙종 28) 우의정 신완(申琓)은 구전을 “중외(中外)의 호구(戶口)에 균등하게 나누되, (신분의) 귀천(貴賤)을 논하지 않고 호구를 헤아려 동전을 거두는 것”으로 규정하였다[『숙종실록』 28년 8월 11일]. 비록 1711년(숙종 37)의 양역변통 논의에서 일부 논자들은 구전이 시행하기 번잡스럽다고 말하였지만 판중추 이이명(李頤命)은 구전의 유용성을 계속해서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중국 한(漢)나라는 15세부터 65세까지의 백성을 정(丁)으로 하고, 모든 정은 부전(賦錢)을 내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후로 왕조가 바뀌어도 모든 구(口)는 부(賦)를 내었고, 당시의 청인들도 무은(畝銀)·정은(丁銀)의 명목으로 부를 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숙종실록』 37년 8월 17일].
이후로 숙종대의 구전 논의는 호포의 방식을 포함하여 호구전(戶口錢)으로 거론되기도 하였다[『숙종실록』 37년 12월 27일]. 하지만 정작 영조대에 다시 호포론이 대두되고 결포의 유용성이 제기되자, 구전론은 위축되었다. 당시의 군역 재원에 관한 논의는 영조의 강력한 의지도 작용하여 호포와 결포로 좁혀졌다.
비록 구포나 구전이 실제로 양역변통의 방법으로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양역변통 논의가 진전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군관을 설치하거나 군역 부담을 토지에 전가하여 군역을 상층 신분에게 확대·적용할 수 있는 논의 환경을 확보하는 데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 정만조, 「조선 후기의 양역 변통 논의에 대한 검토: 균역법 성립의 배경」, 『동대논총』 7, 1977.
■ 정연식, 「조선 후기 ‘역총’의 운영과 양역 변통」,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